역사적 이야기

유대인을 증오하면서도 유대인 여성을 사랑했다, 나치 요인들의 숨겨진 연애사

나치에게 유대인은 모든 악의 화신이었다

나치에게 유대인은 모든 악의 근원이자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광적인 증오는 단 몇 년 만에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절멸 시스템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제3제국의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도 계획된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난 사례들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말입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 민족에 대해 품게 된 혐오와 증오가 정확히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정황에 따르면 1919년, 즉 그가 독일의 권력을 잡기 수년 전부터 이러한 감정은 이미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로렌스 리스(Laurence Rees)는 저서 『홀로코스트, 새로운 역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우였던 아돌프 겜리히(Adolf Gemlich)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인용하며 이 점을 지적합니다.

1919년 9월 16일자로 전우 아돌프 겜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뿐 아니라 독일 전체 국민의 고통까지 유대인 탓으로 돌렸습니다. "우리 안에는 외래의 비(非)독일 종족이 있다"고 히틀러는 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버리고 싶어 하지도, 버릴 수도 없으면서 [...] 우리와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누리고 있다."
[...] 종교든,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사람들이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싸우게 만드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목표 달성과 부와 지배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들의 활동은 각 민족 사이에 인종적 결핵을 일으킨다." 히틀러가 지목한 적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어떤 독일 정부의 '최종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하고 철저한 제거'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기 훨씬 전부터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설파했습니다.

유대인과의 성접촉 금지법

권력 장악 후 나치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독일 국가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성적 접촉을 금지하는 법을 도입했습니다. 리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서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 보호법'이 통과되면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성적 접촉 금지가 마침내 법제화되었습니다.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Wilhelm Frick)은 7월 말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준비 중이라고 발표했는데, 새 입법이 통과된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히틀러는 자신의 끔찍한 절멸 계획을 실행할 부하들과 군인들에게도 같은 증오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동정심, 심지어 사랑이 명령과 이데올로기를 가로막았습니다.

수용소 안의 금지된 사랑

나치와 멸시당하는 '인종적 적' 사이의 관계는 때때로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가장 특이한 사례 중 하나는 아우슈비츠의 경비병 프란츠 분쉬(Franz Wunsch)와 슬로바키아 출신 유대인 여성 헬레나 치트로노바(Helena Citronova) 사이에 맺어진 인연이었습니다.

헬레나는 1942년 3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젊고 체력이 좋았던 그녀는 도착 직후 건물 철거 현장의 중노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녀는 가혹한 환경과 부족한 식량이 자신의 건강을 갉아먹고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빠르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수감자들처럼 더 나은 코만도(작업부대)로 옮겨지기를 갈망했습니다.

여성이 원했던 곳은 '캐나다(Canada)'였습니다. 이곳은 경비병들의 감독 아래 도착하는 유대인들이 남긴 소지품과 귀중품을 분류하는 부대로, 노동 강도가 크지 않았고 수감자들은 잡동사니를 몰래 챙겨 나중에 음식과 교환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헬레나가 그 부대에 들어간 계기는 하필 '노래'였습니다. 어느 장교의 생일을 맞아 경비병들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수감자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동료들의 권유로 슬로바키아 여성은 학교 시절 배웠던 독일 노래 한 곡을 불렀고, 그 효과는 전격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생일 주인공, 분쉬는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 것입니다.

매료된 남자는 자신이 마음에 두는 여자가 '캐나다'에 영구적으로 배치되도록 알선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그녀를 정기적으로 볼 수 있었고, 편지와 선물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헬레나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로렌스 리스는 저서 『아우슈비츠, 나치와 최종 해결책』에서 그녀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가 내가 일하던 막사로 올 때면, 내 곁을 지나며 몰래 쪽지를 던졌습니다. 나는 읽고 나서 그것을 없애버리곤 했지만,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기야, 너를 사랑하게 됐어." 나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SS 장교와 함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헬레나는 자신의 가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증오는 서서히 감정으로 변해갔습니다. 프란츠의 노력은 수용소에서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이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는 의지처가 되어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연인의 여동생을 죽음에서 구해내 두 사람이 함께 '캐나다'에서 일하도록 배려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SS 장교와 유대인 여성의 관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후 누군가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고 밀고하면서 분쉬와 치트로노바는 체포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다고 진술했고, 며칠 후 석방되었습니다. 다만 이후로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드러낼 때 훨씬 더 조심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 장교는 이 인연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전선으로 파견되기 전 그는 연인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빈의 주소를 남기며 거기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다렸지만, 헬레나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의 연인들은 1972년, 분쉬가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면서 빈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치트로노바의 증언은 경비병의 잔혹함을 증언한 다른 증인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수십 년 후 수용소에서의 인연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는 좌우를 살피고는, 아무도 우리를 듣지 못할 때 "사랑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말이 이 지옥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줬고, 힘을 실어줬습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어떤 계획도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비현실적인 일이었죠. 하지만 때로는 내가 유대인이고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곤 했습니다. 정말로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죠.

선전상의 곁에 있던 유대인 여성

로맨스와 '금지된' 감정은 하급 장교들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부 최고위층에서도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가장 신뢰하던 인물 중 한 명인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조차 유대인 여성과 관계를 맺은 적이 있습니다.

훗날 선전·계몽상이 된 그는 NSDAP(나치당)의 지도자를 직접 만나기 전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의 개인 노트에는 이미 총통에 대한 찬탄이 등장합니다. 1924년에는 고향 라인란트에서 나치를 지지하는 단체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이미 그 시절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기 발췌문입니다. 로렌스 리스는 저서 『홀로코스트, 새로운 역사』에서 이를 인용합니다. "나는 폭크(Völkisch) 진영에 서 있다. 나는 유대인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증오한다. 그는 나에게 깊은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다."라고 괴벨스는 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격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인은 엘제(Else)라는 이름의 젊은 유대인 여성과 정기적으로 만났습니다. 그것도 그가 나치당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에 말입니다!

훗날 히틀러의 측근이 된 그는 자신의 기록에 여자친구를 사랑하며 그녀가 '착하고 아름답다'고 적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연인에게서 '불안한' 요소를 발견했다며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엘제의 성격 속 유대인적 기질은 종종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고 그는 어느 날 일기에 적었습니다.

이 특별한 관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고백한 직후 괴벨스는 연인을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다소 지루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후 그는 완전히 정치 경력에 헌신했고 점점 더 큰 영향력을 쌓아갔으며, 1931년에야 이혼녀 마그다 콴트(Magda Quandt)와 결혼했습니다.

히틀러가 손에 입을 맞추던 유대인 여성

총통의 주변에도 유대인 출신 여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을 흠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영사 주세페 렌체티(Giuseppe Renzetti)의 아내이자 글리비체 유대인 공동체 회장 아르투어 코흐만(Artur Kochmann)의 딸인 수잔나 렌체티(Susanna Renzetti)였습니다.

두 사람은 수잔나가 십대 시절이던 실레지아에서 만났습니다. 주세페는 당시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그의 청혼은 여성의 가족에게 꽤 곤란한 문제였지만, 결국 결혼이 허락되었습니다. 몇 년 후 그에게 큰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는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사이의 연락책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독재자의 총애를 받던 그와 아내는 히틀러의 측근들에게도 매우 환영받는 존재였습니다.

렌체티 부부는 수많은 리셉션에 참석했고, 헤르만 괴링의 결혼식에도 손님으로 초대받았습니다. 당시 아무도 외교관 아내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수잔나는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존재가 되었고, 히틀러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꽃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공식적인 틀을 넘어서지 않았지만, 그가 그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히틀러의 눈에 그토록 존중받은 유일한 유대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3제국 지도자의 총애는 끝이 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믿을 만한 이탈리아인이 필요하지 않았고, 주세페와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의 외교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 스웨덴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그는 베를린 상류 사교계와의 접촉을 재개하지 못했고, 1943년 무솔리니 실각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편에 섰을 때는 독일에 남을 명분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고 문헌

  1. Laurence Rees, 『The Holocaust, A New History』, Prószyński i S-ka, 2017.
  2. Laurence Rees, 『Auschwitz, The Nazis and the Final Solution』, Prószyński i S-ka,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