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용병에서 시작된 기병의 역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한때 강대국으로 만든 기병, '날개 달린 후사르'의 역사는 의외로 세르비아 용병에서 시작됩니다.
'후사르(hussar)'라는 단어는 아마도 '말을 탄 전사'를 뜻하는 세르비아어 '우사르/구사르(usar/gusar)'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메니아어 기원설 등 다른 어원들도 제시되지만, 어쨌든 날개 달린 기사들의 뿌리는 발칸반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폴란드에 니콜라 테슬라와 아나 이바노비치의 고향 출신 전사들이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시기는 15세기 말이었습니다. 동쪽과 남동쪽에서 전쟁의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크림 타타르족은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해갔고, 모스크바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루테니아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했으며, 오스만 군대가 처음으로 폴란드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경기병 중심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무거운 장창 중기병을 상대로 내보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타타르나 모스크바와의 충돌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스만 튀르크는 폴란드의 수도마저 진정으로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적이었습니다. 크라쿠프의 바르비컨(Barbican)이 오스만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 위협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몰다비아 등지에서 이들과 맞서 본 경험은 있었지만, 부수적인 국지전과 기독교 유럽 전체가 두려워하던 거대 제국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여기에는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라코비에(Racowie)
이들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A팀처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고, 그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라코프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넓은 의미에서 라코비에(Racowie)는 세르비아인을 가리킵니다. 라틴어 문헌에서 세르비아는 흔히 레그눔 라치에(Regnum Racie), 즉 '라차 왕국'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로는 긴 장병기를 장비하고, 방어구로는 한쪽이 길게 뻗은 뿔이 달린 나무제 '터키 방패'를 주무기로 삼은 세르비아 기병을 의미합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과 싸운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무슬림이 더 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1459년 그들을 유럽의 정치 지도에서 지워냈지만, 발칸 출신 전사들은 다른 나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헝가리군에 복무했고, 15세기와 16세기가 교차하는 무렵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급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라코프는 후사르라고도 불렸습니다. 군사사학자들은 이 두 개념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알렉산드르 카자코프(Aleksandr Kazakou)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후사르는 플레어(flare, 경기병)와 달리 사슬 갑옷 같은 방어구를 사용했다고 여겨집니다. 플레어로 등장한 병사들은 세르비아계였던 반면, '후사르'라는 명칭은 헝가리인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부대의 구분은 사실 매우 유동적이었습니다. 앞서 인용한 카자코프조차 한 단락 뒤에서 "라코비에, 즉 후사르"라고 언급합니다. 어느 쪽이든 세르비아 용병들은 1506년 클레츠크(Kleck)에서 타타르를 상대로, 1514년 오르샤(Orsza)에서 모스크바군을 상대로 벌인 기병 돌격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군사적 우월함을 자랑하는 방식도 독특했습니다. 패배한 적의 목을 베어 가져왔던 것입니다.
폴란드가 튜턴 기사단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후사르는 계속 경기병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1525년 프로이센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이 지기스문트 1세 구왕에게 신충의 맹세를 하면서, 중무장 창기병의 존재 가치는 사라져갔습니다. 한편으로 중기병은 주변부로 밀려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사르 부대가 서서히... 중기병으로 진화해 갔습니다.
"화려함과 적의 공포를 위해"
변화는 사슬 갑옷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531년 오버티른(Obertyn)에서 몰다비아군과 벌인 전투에서는 흉갑(cuirass)을 착용한 최초의 후사르가 등장했습니다. 흉갑은 몸통을 보호하면서도 상당한 운동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1576년 즉위한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국왕은 후사르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통치 초기는 극도로 험난했습니다. 귀족 일부는 다른 왕을 옹립했고, 군대는 초라한 상태였으며, 단치히(그단스크)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하는 도시를 응징할 준비를 하며 바토리는 후사르 기병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조직과 무장이 확정되었습니다. 군주는 "병사들의 말이 좋고 튼튼해야 한다"고 명했고, 병사들은 투구, 철 장갑, 사브르를 갖추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화려함과 적의 공포를 위해 깃털과 기타 장식"을 달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중기병이라기보다는 준중기병이었지만, 군사사학자 즈비그니에프 훈데르트(Zbigniew Hunder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후사르가 중기병의 지위를 얻은 것은 완전판금 갑옷을 입은 창기병이 사라지고, 반쯤 무장한 후사르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후사르는 여전히 중간 무장의 기병이었지만, 중무장 기병이 해체된 폴란드의 현실 속에서 사실상의 중기병이 되었습니다.

스테판 바토리는 후사르 편성으로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1577년 루비에쇼프(Lubieszów) 전투에서 후사르의 돌격은 단치히가 고용한 용병들을 완전히 휩쓸어 버렸습니다. 피해의 격차는 천문학적이었습니다. 왕실군의 사망자는 약 60명, 부상자 127명에 불과했던 반면, 반군 측 사망자는 약 4천500명에 달했습니다.
바토리 시대부터 기병대의 편제가 표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후사르 기병대'라는 명칭이 다수가 후사르라는 정도를 의미했을 뿐, 다른 유형의 병사들도 함께 복무하는 다소 혼잡한 부대였습니다. 재편 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1598년에야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00년간 이어진 후사르의 승전 행진
개편 이후 후사르는 사실상 어떤 적이든 짓밟을 수 있는 기병으로 거듭났습니다. 폴란드 역사상 후사르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기병은 세계 각지의 적들을 몰아냈습니다. 1588년 비치나(Byczyna) 근교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꿈꾸던 막시밀리안 대공의 군대를 격파했고, 1600년에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군주 미하이 용감공의 군대를 부코바(Bukowa) 근방에서 몰아붙였습니다.
17세기 초 리보니아를 둘러싼 스웨덴과의 전쟁을 영화로 만든다면 제목은 아마 '리투아니아 후사르 학살극'이었을 것입니다. 적이 수적으로 우세한가? 문제없습니다, 창 한 자루만 주십시오. 1601년 코켄하우젠(Kokenhausen)에서는 연방군 3천500명이 스웨덴군 4천900명을, 3년 뒤 비아위 카미엔(Biały Kamień)에서는 2천300명이 5천~7천 명을, 그리고 1605년 키르홀름(Kircholm)에서는 3천700~4천350명의 폴란드군이 1만1천~1만4천 명의 스웨덴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모든 전투는 산수를 거스르며 승리했습니다.
수치는 어느 정도 근사치이지만, 이 경우 백 명 정도의 오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압도적인 격차입니다. 특히 키르홀름은 손실 비교만 놓고 봐도 압권입니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Jan Karol Chodkiewicz)는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 9천 명의 손실과 맞바꿔 자군 손실을 고작 100명으로 줄이며,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를 거두었습니다.

관점을 바꿔 보겠습니다. 1605년, 스웨덴 국왕 카를 9세는 1만1천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나섰는데, 최소 3분의 1에 불과한 적군에게 완벽하게 휩쓸리고 만 것입니다!
5년 뒤인 1610년 7월 4일, 스타니스와프 주우키에프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는 클루시노(Kłuszyn)에서 더욱 극심한 수적 열세 속에 3만 명이 넘는 모스크바군을 분쇄했습니다. 예전에는 그가 7천 명(후사르 5천556명 포함)을 지휘했다고 여겨졌지만, 현재는 기병 2천500명과 보병 200명뿐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오스만 튀르크도 후사르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1621년, 폴란드군 기병 600명이 호틴(Khotyn) 인근 진영을 떠나 약 1만 명의 오스만군을 전장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술탄 오스만 2세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연방의 연이은 승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683년 빈 근교에서, 연합 기독교군이 멈춰 선 채 튀르크를 향해 돌진하는 날개 달린 기사들을 우러러보았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병 돌격 중 하나로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됩니다. 폴란드 후사르는 유럽의 구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코피이니키(Kopijnicy): 후사르를 정의하는 무기
후사르를 정의하는 무기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소나무나 전나무로 만들고 끝에 강철 촉을 단 긴 창입니다. 앞서 인용한 즈비그니에프 훈데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후사르의 창은 기사 시대의 전신 무기와 매우 다른 독특한 무기였습니다. 창 끝에서 후사르가 쥐는 부분(손잡이)까지 내부를 파냈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속을 파낸 결과 창의 무게중심은 속이 차 있는 부분, 이른바 '꼬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사르는 무기의 길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고, 이것은 장병기로 무장한 창병-머스킷병 보병 진영에 돌격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이런 창의 길이는 3.3m에서 6.2m에 달했습니다. 덕분에 보병의 파이크보다 길었고, 후사르는 방어하는 보병이 닿기 전에 먼저 찌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후사르는 콘체르츠(koncerz)라고 불리는 긴 검, 대검, 사브르, 권총, 심지어 활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후사르의 돌격이 항상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1622년 미타바(Mitawa)와 1626년 그니에프(Gniew)에서 스웨덴군과 벌인 전투가 그 예입니다. 특히 후자는 '후사르의 첫 패배'로까지 일컬어졌습니다. 이러한 사학적 통념은 최근 날개 달린 기사의 역사에 관한 최고 권위자인 라도스와프 시코라(Radosław Sikora)가 정리했습니다. 후사르의 돌격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강력했지만, 기병이 돌격로의 장애물을 치워야 했고, 그 임무는 보병의 몫이었습니다. 이런 지원이 없으면 승리는 불가능했습니다.

좋은 예가 1702년 클리슈프(Kliszów)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 후사르는 스웨덴 보병을 상대로 고전했습니다. 예전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현대식 부싯돌 머스킷을 사용한 것이 승리의 열쇠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라도스와프 시코라가 보여주었듯, 머스킷 자체는 폴란드 기병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일제 사격을 견뎌냈습니다. 문제는 '셰이커(shakers)'로 추정되는 장애물, 즉 구멍을 뚫은 들보에 뾰족한 말뚝이나 창을 꽂아 만든 방어 진지에 말발굽이 걸려 움직임이 묶이는 동안, 스웨덴군이 두 번째 사격을 퍼부을 시간을 벌어버렸다는 점입니다.
18세기는 폴란드 역사에서 이 부대의 존재감이 기울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사회는 가난해졌으며, 호드키에비치, 주우키에프스키, 얀 소비에스키 같은 지도자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귀족들도 예전처럼 후사르 기병대에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학계 연구자들조차 날개 달린 기사들의 느린 죽음을 정밀하게 기술하는 데 큰 열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후사르의 상징적 종언은 1775년 국민기병(National Cavalry)이 창설된 해로 여겨지지만, 1780년 문헌에서도 여전히 '후사르'라 불리는 기병여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군 부대, 특히 기갑부대에서 파생된 부대들은 후사르의 상징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