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년, 차르 궁정의 유행은 폴란드 콘투시
1680년 모스크바 차르 궁정에서 유행의 정점에 서 있던 것은 다름 아닌 폴란드 전통 의상인 콘투시(kontusz)였습니다. 폴란드에서 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더 세련되고 우아한 것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평민들 사이에서도 일상 대화에 폴란드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17세기 차르 러시아가 스스로를 '폴란드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과연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열풍은 왜 결국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까요?
위에서부터 시작된 변화
1680년대 초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폴란드 문학과 풍습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본보기는 언제나 위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차르와 그 최측근들, 특히 왕비와 차르의 누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사와 중동부 유럽사 전문 역사가 안제이 안드루셰비치(Andrzej Andrusiewicz)는 저서 『불굴의 여인들 – 로마노프 제국의 강한 여자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들은 서구, 곧 '라틴' 세계를 지향하는 명확한 정치·문화적 방향을 갖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단순한 유행이나 서구 문명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훨씬 깊은 정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폴란드식으로
표도르 3세 알렉세예비치는 황좌의 이상적인 후보는 아니었습니다. 폭넓은 교양과 국가 개혁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건강이 극도로 허약했습니다. 이른바 '전반적 허약함' 때문에 장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지 못했죠. 그러나 167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된 그는 의외로 유능하고, 한편으로는 고집 또한 강한 통치자임을 입증했습니다.
1679년, 종교 행사에 참석한 한 무명의 평민 처녀에게 눈길이 꽂힌 차르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선택은 폴란드 혈통을 이은 드보랴닌(귀족)의 딸, 아가피아 그루셰츠카야였습니다. 그녀의 궁정 등장은 폴란드 문화에 대한 열광을 한층 더 부채질했습니다.

러시아의 폴란드화는 표도르 3세 로마노프와 폴란드 혈통의 왕비 아가피아 그루셰츠카야의 통치 시기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 흐름의 선두에 선 것은 표도르 본인이었습니다. 스승 시메온 폴로츠키의 영향 등으로 그는 폴란드 문화의 열렬한 애호가였고, 차르 궁정의 언어를 폴란드어로 사용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왕비와 함께 솔선수범하며 주변 인사들에게 폴란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안드루셰비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모스크바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폴란드 문화의 전례 없는 영향력이 나타났다. 폴란드 책을 읽고, 폴란드 말을 타고, 폴란드 콘투시를 입었다. 폴란드어 낱말과 어구가 러시아어에 스며들었다. 문화와 유럽에 대한 이해 면에서 폴란드인은 러시아인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권력 다툼의 부산물로 사라진 열풍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681년 7월 아가피아가 산욕 합병증으로 요절하면서, 그리고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차르 본인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궁정의 폴란드 열풍에도 종말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유일한 자식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일리야는 태어난 지 겨우 10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젊은 홀아비 차르는 재혼을 선택했지만, 15세 마르파 프라크시나와의 두 번째 결혼은 고작 두 달밖에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표도르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1682년 5월 7일(율리우스력 4월 27일) 차르가 세상을 떠나자, 국정은 미성년인 남동생들 이반과 표트르를 대신하여 그의 당찬 누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가 섭정으로서 물려받았습니다. 소피야는 차르 생전에 아가피아의 가까운 조언자이자 친구였으며, 서구—곧 폴란드—를 향한 정치·문화 노선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실권을 쥔 뒤 그녀는 표도르의 친폴란드 노선을 계승하는 일보다 더 절박한 문제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반 지지파와, 훗날 역사에 '대제'로 이름을 남길 당시 10세의 표트르 지지파 사이의 냉혹한 권력 다툼이 한창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음모가 끊이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인들 사이에 폴란드 문화를 보급하려는 시도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게다가 불과 7년 뒤 실패한 쿠데타로 소피야는 권좌에서 축출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수녀 '수산나'라는 이름으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안드루셰비치는 "러시아의 폴란드화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은 독특한 현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후 폴란드와 폴란드인의 역사를 돌아보는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 자료
- 안제이 안드루셰비치, 『불굴의 여인들 – 로마노프 제국의 강한 여자들(Niepokorne)』, Bellona,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