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다면, 영원히 잠들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장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애도의 기간은 얼마나 길었으며, 정말로 케르베로스에게 단 음식으로 뇌물을 바칠 수 있었다는 말은 사실일까? 프로테시스(prothesis), 에크포라(ekphora), 페르데이프논(perdeipnon)이라는 의식의 단계를 차례로 따라가며, 그리스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떻게 작별했는지 살펴보자.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의 문학 작품은 당시 장례 의식이 어떤 형태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족들의 울음소리, 탄식, 고인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문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 남아 있는 묘지 건축물, 암포라에 그려진 회화 등 유물 자료까지 더해지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족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장례 의식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작별, 프로테시스
고대 그리스에서 죽은 자의 시신은 공개적으로 안치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가족과 지인들이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기도 했다. 의식의 첫 단계에서는 시신의 눈을 감아주고, 가는 천으로 손과 발, 턱을 묶었다. 그다음 입에는 카론(명계의 뱃사공)에게 지불할 오볼루스 은화를 물리고, 손에는 명계의 입구를 지키는 세 머리 개 케르베로스를 달래기 위한 꿀 케이크 한 조각을 쥐여주었다.
시신을 장례에 맞게 준비하는 일—세수, 향료 발르기, 아마포 수의로 감싸기(머리만은 노출)—는 대개 여성들이 맡았다.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머리맡에는 베개를 받쳐주었으며, 이렇게 준비된 시신은 다리가 방 출입문을 향하도록 나무 침상 위에 모셔졌다.

탄식과 통곡은 고대 그리스 작별 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고인은 보통 하루 동안 집의 현관에 안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유족들은 탄식을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장례 의식의 불변의 요소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은 울부짖고 노래하며 통곡했고, 머리카락을 뜯어 뽑고, 옷을 찢고, 절망에 빠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몸을 던졌다. 이러한 격한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감정을 해소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탄식의 장면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헥토르가 죽자 트로이 사람들이 통곡하고,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뜯으며 비명을 지르고, 아버지는 모래 위를 뒹군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장례의 중요한 요소로는 화장터나 무덤 앞에서 낭송되는 추도 연설도 있었다. 연설에서는 고인의 삶과 업적이 거론되며 그를 기렸다. 이런 애도가(트렌, tren)는 대개 장례 때 불렸지만, 기일에도 다시 불렸다. 애도가는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고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 행렬과 매장, 에크포라
집에서 하루 동안 작별을 마친 뒤에는 시신이 밖으로 옮겨졌다. 이는 해가 뜨기 전 완전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태양신 아폴론이 죽은 자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인이 누워 있던 침상은 가족들이 직접 메거나, 꽃과 화관으로 장식된 수레에 실어 운구했다. 행렬의 맨 앞에는 고인의 유골을 담을 항아리를 준비해 든 여성이 섰고, 맨 뒤에는 종복들과 음악가들이 따랐다. 흥미롭게도 장례 행렬에는 60세 이상의 여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장지에 도착하면 시신은 옷을 입은 채 화장되거나(옷은 저승에서도 쓸모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무덤에 직접 안치되었다. 화장과 토장은 병행되는 두 가지 매장 형식이었으며,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쇠퇴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고인의 이름을 세 번 크게 외치며 매장지를 떠났다.
기원전 6세기에는 돌, 벽돌, 흙으로 무덤이 만들어졌다. 죽은 자는 대개 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혹은 근처에 파 놓은 얕은 구덩이에서 화장되었다. 그다음 재와 뼈를 별도의 그릇에 담아 땅속에 묻고 그 위에 봉분을 쌓았다. 시신을 무덤에 직접 안치할 경우에는 덩굴줄기를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올린 뒤(점토 관이나 나무 관을 쓰기도 했다) 매장했다.

케라메이코스 — 아테네의 묘지
묘비에는 그 무덤에 묻힌 사람과 그를 애도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새겨졌다. 또한 고인의 가장 좋은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상(대개 과장되게 표현됨), 즉 전사나 운동선수의 모습, 사냥이나 전투를 소재로 한 신화 장면을 새긴 스텔레(stelae, 비석)가 세워졌다.
제물은 장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였다. 제물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인을 위해 함께 넣어주는 일상용품, 도구나 동물(양 또는 염소)을 바치는 제사, 그리고 포주(포제), 즉 포도주를 붓는 제의가 그것이다.
장례를 주관할 의무는 보통 고인의 아들이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있었다. 장례는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재산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기에 아테네는 일정 금액 이상을 지출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8세기의 묘지들은 대개 도시 성벽 바깥, 특히 서쪽에 위치해 있었지만(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솔론의 법에 따르면 사람을 매장하는 땅은 척박한 땅이어야 했다.
애도의 시간
애도 기간 동안 유족들은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깎았으며, 위생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잔치를 열지 않았고, 놀이와 노래, 악기 연주도 피했다. 그리스인들은 장례 후에 반드시 손을 씻었는데, 이는 죽은 자와의 접촉을 물리적인 오염과 더러움의 원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덤과의 접촉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무덤은 두 세계의 경계이자 동시에 죽은 자와 접촉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장례 사흘 뒤에는 물이나 연기로 죽은 자의 집을 정화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집 사람들은 잘라낸 머리카락을 현관 앞에 두었다. 이는 이 집에서 '오염'에 감염될 수 있다는 표시였다. 장례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땅으로 넘어가는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이었다. 유족들은 고인의 분노를 두려워했기에 의식을 그에 걸맞은 경건함으로 대했다. 산 자들은 시신을 땅에 묻어 흙에 맡기고, 영혼은 허공(에테르)으로 보내졌다(그리스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장례를 마친 며칠 뒤에는 고인을 기리는 만찬이 열려 애도의 시간을 마무리했으며, 이 만찬은 매년 기일에도 숭배의 일환으로 거행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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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nniczuk L.,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 풍습과 관습』, Warsaw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