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서 끌려가고, 강제로 낙태당하고, 성폭력에 시달리고, 지쳐 몸이 무너져도 2등 국민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티푸스와 결핵과 싸우며, 자신의 조국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간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유대인 게토는 1939년 12월에 설립되었습니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폴란드에는 수백 개의 게토가 만들어졌고, 이후 소련 지역으로도 확대되었습니다. 규모와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든 게토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머지 인구로부터의 강제 격리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성들은 빠르게 게토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았습니다. 자선 활동 기금을 모으고, 주민위원회에서 쫓겨날 집을 두고 협상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음식과 옷을 나눠주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 아이는 태어나서는 안 된다”
게토에 갇힌 유대인 여성들은 특히 참혹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베를린에서 내려온 명령은 결혼과 출산을 금지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 했던 것입니다. 임신 3개월에 이른 여성은 수술(낙태)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치의 이념에 따르면 유대인 아이는 경제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으며, 미워하는 민족의 미래가 될 가능성만 있는 존재였습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유대인 여성들에게 낙태 결정은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들은 수술이 영구적 불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금지 명령과 이를 어겼을 때의 결과를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극심한 피로, 영양실조, 스트레스로 인해 생리 주기가 불규칙해지거나 아예 사라졌고, 여성들은 임신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토에서 일했던 한 산부인과 의사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여성들은 자신도 모른 채 임신 후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 1942년 7월의 명령에 따라 카우나스 게토에서는 임신이 산모, 남편, 갓난아기 전원의 사형 선고를 의미했습니다 (...). 우리는 수천 건의 낙태 수술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
빌니우스 게토의 병원은 주로 낙태 수술에 사용되었습니다. 스스로 결정한 여성도 있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수술대에 오른 여성도 있었습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무엇보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마음 때문에 일부 게토에서는 여성들이 직접 믿을 만한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저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을 수술대까지 데려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수술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을 수도 있었죠. 수술 자체 외에 아무것도 마련해줄 수 없었습니다. 요양할 환경도 없었고요. 하지만 그래야만 했습니다. (...) 저는 그들을 손으로 붙잡아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게토에서의 출산
그럼에도 임신을 지키기로 하는 극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저마다 달랐습니다. 새 생명에 대한 꿈일 수도, 세상을 떠난 아이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여성들』이라는 책에 실린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아이를 낳고 싶어집니다.”
같은 책에는 당시 14세 소녀가 목격한, 게토 담벼락 아래에서 벌어진 출산의 충격적인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여자는 네 발로 기어갑니다. 머리카락은 엉켜 있고, 옷은 땅에 끌려 더럽혀졌으며, 눈은 크게 벌어지고 얼굴은 일그러져 있습니다. 부어오른 배가 땅에 닿아 있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 그녀는 몇 분마다 멈춥니다. 짐승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어디선가 위험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살핍니다. (...) 밤새 몸을 웅크린 채 탈진하고, 통증에 몸부림치며, 그녀는 곧 아이가 나올 것을 느꼈습니다. 거리 한복판, 게토 입구 바로 앞에서 비를 맞으며, 사람에게 치이지 않도록 보도를 따라 기어갑니다. 이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좌우로 몸을 구르는데 진통이 경련처럼 느껴지고, 뱀처럼 몸을 뒤틉니다.” 그녀는 떨림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죽음이 그녀의 고통을 끊어낸 바로 그 순간, 작은 여자아이가 고통과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태어났다. (...)

게토에서는 노점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사진은 담배 노점 앞에 모인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게토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종종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의사로 일했던 아디나 블라디-즈바이게르(Adina Blady-Szwajger)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태어납니다. 대피소에서도, 지하실에서도. 다만 자주 죽을 뿐이고,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촌의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본 한 여성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이는 요람에 움츠러들고 주름진 채 누워 있었습니다. 팔다리는 몸에 바짝 붙어 있었고, 고개는 뒤로 젖혀져 있었으며, 침을 흘리며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폭력
유대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 역시 게토의 잔혹한 현실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여성들』에는 이 같은 실상을 보여주는 몇몇 매우 참혹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독일군은 남자들을 샅샅이 뒤져 돈을 모두 빼앗은 뒤, 여성들에게 알몸이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 그들은 여성들을 두 시간 넘게 알몸으로 세워두고, 가슴과 은밀한 부위에 권총을 겨누며 전원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게토 안에서 헌병들에 의한 집단 강간은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여성들은 부엌이나 빵집에서 일한다는 명목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강간을 당하고 성병에 감염된 채 돌아왔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려던 소녀들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바르샤바의 한 유대인 의사는 회상했습니다.
“바르샤바에서는 유대인 소녀들에 대한 강간 소식을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독일군이 집에 뛰어들어 열다섯, 열여섯 살 소녀들을 부모와 친척이 보는 앞에서 강간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가해자가 독일인이나 여러 국적의 헌병들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 여성들은 같은 유대인들에게서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게토에서의 삶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악몽은 이제야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추방이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이 글은 포즈난 출판사(Poznań Publishing House)에서 펴낸 『홀로코스트의 여성들(Women of the Holocaust)』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