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영국 왕 헨리 5세의 시신은 왜 잘게 썰어 삶아졌을까?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군주 헨리 5세의 유해는 살과 지방이 뼈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통째로 삶아졌습니다. 겉보기에는 끔찍해 보이지만, 이는 식인을 위한 준비도 아니고 왕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기괴한 의식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에서 비롯된 일이었는데요.

중세 최후의 위대한 전사

헨리 5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흔히 '중세 왕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위대한 전사'라고 불립니다. 그는 헨리 4세와 첫 번째 아내 메리 부운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원인 불명의 병을 앓던 아버지가 요절하자 1413년 3월 21일 왕위에 올랐습니다(대관식은 두 주 뒤 거행). 아버지 헨리 4세가 앓았던 병이 나병인지, 매독인지, 아니면 간질이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입니다.

포도주와 식초에 삶아진 시신

새로 즉위한 헨리 5세의 건강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정복에 나섰고,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합니다. 백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아쟁쿠르 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파란 끝에,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설득해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헨리는 샤를 6세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지요. 게다가 그는 한때 적수였던 샤를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면서 배우자까지 얻게 됩니다.

영국 왕 헨리 5세의 시신은 왜 잘게 썰어 삶아졌을까?

헨리 5세는 넷플릭스 영화 '더 킹(The King)'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곧 영국 군주는 대륙에서의 승리와 가정의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밟은 것은 1421년 초였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 임신한 아내를 남겨둔 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했던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422년 여름,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장인 샤를 6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헨리 5세는 방생 성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께서 내가 늙도록 살게 해 주시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치게 해 주셨다면, 나는 성지를 정복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 여유는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렇게 자비롭지 않았습니다. 8월 31일, 겨우 35세의 나이로 영국의 군주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중세 의학의 수준(그리고 악명 높은 위생 상태)을 감안하면 이런 죽음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충격적인 것은 오히려 왕이 죽은 후 그의 유해에 가해진 처사였습니다. 제니퍼 우드워드(Jennifer Woodward)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시신은 '모스 튜토니쿠스(mos teutonicus)'라 불리는 기법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시신은 잘게 분할된 뒤, 지방과 근육이 뼈에서 분리될 때까지 포도주와 식초에 삶아졌습니다.

영국 왕 헨리 5세의 시신은 왜 잘게 썰어 삶아졌을까?

헨리 5세의 시신에 대체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보통 귀족 출신 인물이 해외에서 사망하면 뼈만 영국으로 돌려보내고 연부 조직은 현지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헨리의 경우에는 뼈와 나머지 신체가 모두 향신료 가득 담긴 납 관에 봉인된 뒤 고향으로 운송되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섬뜩한 장례 의식

이 모든 일은 헨리가 운 나쁘게도 고향 잉글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신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지요. 현장에 시신 방부 처리 기술자가 없었기에, (인정하건대) 상당히 섬뜩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모스 튜토니쿠스 의식은 결코 특별히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시대에는 야전 조건에서 시신을 보존할 어떤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귀족 출신 인물이 이교도의 땅에 묻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한편 시신을 통째로 운송하는 것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했습니다) 극도로 비위생적이기도 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 위생 문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해도, 애매한 악취 하나만으로도 이런 원정은 망설여지기 마련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때로는 극단적인 최후의 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왕 헨리 5세의 시신은 왜 잘게 썰어 삶아졌을까?

제7차 십자군 원정 중 루이 9세의 죽음.

예컨대 1270년 마지막 십자군 원정 도중 튀니스에서 세상을 떠난 루이 9세의 유해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다만 모스 튜토니쿠스 방식은 주로 독일 계열 군주들이 선호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논란이 덜한 방부 처리를 더 선호했습니다. 물론 헨리 5세의 사례가 보여주듯, 죽은 후에는 자신의 몸에 대해 크게 발언권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참고 문헌

  1. E.A.R. Brown, Authority, the Family, and the Dead in Late Medieval France, "French Historical Studies", Duke University Press 16/1990, pp. 803-832.
  2. E.A.R. Brown, Death and the Human Body in the Late Middle Ages: The Legislation of Boniface VIII on the division of the Corpse, "Viator", UCLA: Center for Medieval and Renaissance Studies, XII/1981, pp. 223–270.
  3. J. Woodward, The Theater of Death: The Ritual Management of Royal Funerals in Renaissance England, 1570-1625, Boydell & Brewer Ltd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