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두꺼비'에 빗댄 여왕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사실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임신 자체가 두려웠고, 임신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짜증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신경을 긁는 아기들에게는 '두꺼비'라는 별명까지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앨버트 공과의 결혼 전, 스물한 살이 되기 직전의 젊은 군주는 적어도 3년 뒤에야 임신하고 싶다고 솔직히 밝혔습니다. 일기에는 "자녀를 갖는 것이 결혼 생활에서 유일하게 두려운 일"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했죠. 그러나 젊은 여왕 부부는 피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결국 예식을 올린 지 딱 아홉 달 뒤인 1840년 11월 21일 첫딸을 출산했습니다. 훗날 여왕은 "갇힌 느낌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대체 이 혐오감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강요된 고립
빅토리아 여왕의 전기 작가들은 이 혐오의 뿌리가 통치자의 유년 시절에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아버지는 그녀가 겨우 여덟 달짜리 영아였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출신인 어머니는 영국 궁정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서툰 영어를 구사하며 고국 독일로 돌아가는 꿈만 꾸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왕위 계승자인 이상 떠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홉 명의 자녀를 두고도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
어머니는 존 콘로이 대위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를 집사로 삼았습니다. 콘로이는 어머니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의 주도로 미래의 군주는 왕실의 다른 가족들로부터 고립되었고, 유일한 놀이 친구는 콘로이의 딸들이었습니다. 한편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안달이었고, 어른이 되면 또래들로 자신을 둘러싸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그녀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 사랑하는 앨버트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남편보다 덜 중요해"
인생은 그녀에게 다른 계획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모성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여왕은 차례차례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빅토리아(1840), 앨버트 에드워드(애칭 버티, 1841), 앨리스(1843), 알프레드(1844), 헬레나(1846), 루이즈(1848), 아서(1850), 리오폴드(1853), 그리고 베아트리스(1857)입니다. 당시 그녀와 같은 신분의 여성들처럼 수유는 거의 동물적인 행위라고 여겨 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딸 앨리스가 직접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로 결정하자 여왕은 분노를 숨기지 못했고, 윈저의 소 한 마리에게 딸의 이름을 붙여 조롱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앨버트와 빅토리아의 결혼식
여왕은 보모들을 대거 고용했습니다. 자녀들을 하루에 두 번 만났는데, 아침에는 보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와 어머니께 인사드리게 했고, 저녁에는 아이들이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하고 물러났습니다.
맏이 빅토리아, 버티, 앨리스가 십 대에 접어들자 어머니는 가끔 저녁을 부모 곁에서 보내게 해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정했듯,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오히려 "사랑하는" 그리고 "가장 소중한" 앨버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더 선호했습니다.
여왕과 달리 첫째 딸은 모성을 즐겼고 여덟 명의 자녀를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통치자 눈에는 그것이 옳지 않은 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빅토리아가 스물한 달 된 아들 지그문트를 잃었을 때, 어머니는 "아이는 정말 남편보다 덜 중요하다"며 슬퍼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불쌍한 버티
왕세자 앨버트 에드워드는 부부의 가장 큰 희망이었습니다. 부부는 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기로 했고, 여왕은 아들이 자신이 우상화하는 배우자의 산 살아있는 복제품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이를 위해 미래 국왕을 위한 강도 높은 교육 계획이 시행되었고, 교사와 가정교사들에게는 왕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엄격하게 평가하라고 명시적으로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버티는 총명한 아이였음에도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고, 언니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습니다. 교육자들의 보고가 박할수록 아이에게 떠안겨지는 수업은 더 많아졌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커리큘럼 강화는 반대 효과를 낳았습니다. 지친 소년은 오히려 더욱 의욕을 잃어갔습니다.

빅토리아는 자녀들을 자주 만나지 않았다.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더 선호했다.
빅토리아는 왕세자에 대한 실망을 점점 드러냈습니다. 최악의 순간은 1861년 가을 찾아왔습니다. 케임브리지에 머무는 동안 버티가 배우 넬리 클리프든과 스캔들에 휘말린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곧 앨버트는 도덕적 훈계를 위해 버티를 찾아갔습니다. 이미 출발 전 감기 기운이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상태가 악화되었고, 궁정 의사들의 노력도 허무하게 1861년 12월 1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왕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을 버티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면 몸이 오싹해.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장녀에게 털어놓은 심경이었습니다. 이후 40년간 군주는 아들에게 노골적으로 냉담했고, 중요한 국정 사안을 알리지 않았으며 무거운 책임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곁에 묶어둔 딸들
흥미롭게도 자녀들이 자라면서 여왕은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첫째 빅토리아는 프로이센 왕세자와 결혼해 베를린에 살았고 부모를 자주 방문하지 못했지만, 군주에게는 다른 딸들이 곁에서 시중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앨리스에게는 궁정에서 할 일이 많지 않은 하급 독일 군주와 결혼시켜, 처가 궁전에서 오래 머물게 하려 했습니다. 헤센 공자 루트비히가 여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결혼 첫해 앨리스 부부는 실제로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곧 다름슈타트에 자신들의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방문이 끊겼습니다.
또 다른 딸 헬레나 역시 독일 왕자와 결혼해 여왕 근처로 이사 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면서 젊은 어머니가 모친의 변덕을 좇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빅토리아는 막내 베아트리스를 자신의 동반자로 삼기로 결심합니다. 통치자의 계획에 따르면 베아트리스는 영원히 처녀로 남아야 했습니다. 결혼 생각이 나지 않도록 여왕은 친척과 하인들에게 "약혼", "결혼", "약혼녀"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게 금지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한동안 어머니의 뜻에 순응했습니다. 그러나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헨리 배튼버그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왕은 결혼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여섯 달 동안 딸과 말다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두 사람은 하인이 전달하는 메모로 의사소통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늘 순종적이던 베아트리스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습니다.
결혼식은 젊은 부부가 빅토리아의 지붕 아래에서 산다는 조건으로 치러졌습니다. 신랑신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전직 장교였던 헨리에게 왕궁의 조용한 생활은 큰 좌절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참고 문헌
- Dennison M., The Last Princess: The Devoted Life of Queen Victoria's Youngest Daughter. London, 2007.
- Duff D., Albert and Victoria. London, 1972.
- Packard J.M., Victoria's Daughters. New York,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