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아우슈비츠 이후의 삶 – 안네 프랑크의 의붓자매 에바 슐로스가 밝히는 충격적인 생존 이야기

두 소녀는 거의 또래였고, 같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치를 피해 극적인 상황 속에서 숨어 지내야 했던 고통, 밀고, 그리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행.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안네 프랑크와 달리 그녀의 의붓자매 에바는 살아남아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후일담까지 더했습니다.

에바 가이링거(현재 성은 슐로스)는 암스테르담 메르베데플레인 지구의 뒷마당에서 안네 프랑크를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녀는 유명한 『일기』의 저자가 될 소녀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영화 잡지를 넘기며 돌아다녔고, 반려견과 함께 카페에 갔죠.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진짜 상류층 숙녀처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녀는 친구의 운명과 자신의 삶이 얼마나 기괴하게 얽히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억의 악령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한때 일했던 공장 사무실 안의 은밀한 비밀방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2년간 숨어 지냈습니다. 1944년 8월, 잔혹한 운명이 그들을 덮쳤습니다. 네덜란드인 밀고자가 그들의 신병을 알린 것입니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가족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살아남은 이는 오토 프랑크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에바의 어머니 프리치 가이링거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숨어 지냈고, 이후 수용소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녀 자신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고, 딸 역시 구해냈습니다. 전쟁 후 그녀는 암스테르담 시절의 옛 이웃을 다시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경험이 두 사람을 너무나 깊이 연결시켰고, 그들은 결국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에바는 나치가 안네 프랑크에게서 빼앗은 삶을 대신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삶 – 안네 프랑크의 의붓자매 에바 슐로스가 밝히는 충격적인 생존 이야기

이 글은 에바 슐로스와 캐런 바틀렛의 책 『아우슈비츠 이후(After Auschwitz)』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강제수용소의 공포 이후 새로운 삶을 꾸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에바는 40년 동안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말하듯 "이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손주들이 팔뚝에 새겨진 문신 번호에 대해 물으면, 그녀는 그것이 '전화번호'라고 둘러댔습니다.

60세가 되어서야, 상황에 몰린 그녀는 기억의 악령과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해피엔딩을 지닌 이야기임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자유의 첫걸음

에바의 증언에 따르면, "남은 인생"은 1945년 1월 19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추운 아침 눈을 뜨고 막사 주변을 둘러본 그녀의 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경비병도, 개도, 의사도 없이요. 독일군이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비록 '피와 뼈'라는 표현이 우리의 상태를 가장 잘 묘사하겠지만, 우리는 즉시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했습니다." 독일군이 도망쳤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그 순간을 꿈꿨는지요. 하지만 우리는 심각한 문제가 끝났다고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여성들 앞에 놓인 시련은 마치 마카브르 호러 영화에서 나온 듯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밤사이 사망한 동료 수용자들의 시신을 막사에서 옮겨야 했습니다. "전날 밤까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여성들의 차가워진 시신을 옮기던 일은, 오늘날까지 내가 겪은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라고 에바는 회상했습니다.

독일군이 남겨둔 식량과 따뜻한 옷을 비교적 빨리 발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물 부족이었습니다. 폭격 한 번이 수용소의 상수도망을 파손한 것입니다. 전기도 없었습니다. 목마름으로 죽지 않기 위해 수용자들은 눈을 녹여 마셨고, 이후에는 정문 앞 언 호수에서 얼음을 떼어냈습니다.

마침내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도착했습니다.

고단한 귀향길

"어머니와 나는 곧 아우슈비츠를 떠날 수 있어 행운이었습니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요." 에바의 말입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중에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재니 코르트, 한때 꽃을 건네며 첫 연인이 되고 싶어 했던 소년 헤르만 데 레비, 그리고 안네와 마르고 프랑크 자매도 있었습니다.

전쟁 전에 에바가 알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에바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는 인종 청소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나치는 유대인의 마지막 한 명이 지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미친 집착과 고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가족을 유럽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쫓아다녔습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내가 목격한 끔찍한 일들에 대해 듣기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의 귀환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프리치 가이링거가 딸과 함께 네덜란드행 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러 갔을 때, 한 네덜란드계 유대인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입니다. 그리고 당신들 없이도 우리는 현지 유대인 인구로 충분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삶 – 안네 프랑크의 의붓자매 에바 슐로스가 밝히는 충격적인 생존 이야기

나치 학살 기계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 중 한 명, 안네 프랑크. 그녀의 『일기』 판본 표지 사진

결국 두 모녀는 기차와 배를 거쳐 도착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의 네덜란드 아파트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에바는 회상합니다. "그 다음 몇 주 동안 우리는 실제로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을 누렸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예전 그대로는 아니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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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살아가는 법 배우기

생계를 위해 에바의 어머니는 넥타이 공장에서 비서로 일했습니다. 에바도 나무 브로치에 그림을 그려 용돈을 벌었습니다. 점차 그들은 나아졌지만,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소식은 그들의 일상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에바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집 앞에 차가 멈출 때마다 아버지와 하인츠가 내리리라 믿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비극적 진실과 화해해야 했습니다.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도 열렸지만, 많은 이들, 그리고 에바 역시 그 과정에서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삶 – 안네 프랑크의 의붓자매 에바 슐로스가 밝히는 충격적인 생존 이야기

1989년, 어머니와 함께한 에바 슐로스

그러나 시간은 가장 깊은 상처조차 치유합니다. 에바의 삶은 다시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연인을 만나 서로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아우슈비츠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내 호르몬 균형을 무너뜨렸고,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아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세 딸을 낳았고, 과거를 잊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985년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 재단이 주관한 안네 프랑크의 삶에 관한 전시회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마주하기로 합니다. 에바는 어린 시절의 악몽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기로 한 결정은 분명 내 인생을 바꾸었고, 오랫동안 나에게서 강탈당했던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을 떠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주었습니다."

"트라우마와 상실 이후 균형을 되찾는 것은 너무나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어서,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이 달팽이 걸음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어느새 우리는 평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출처

이 글은 에바 슐로스와 캐런 바틀렛의 책 『아우슈비츠 이후 – 안네 프랑크의 의붓자매가 전하는 감동적인 생존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