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온 자매, 원숭이처럼 전시되다
193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디온 자매는 역사상 최초로 유아기를 넘겨 생존한 오생쌍둥이(다섯 쌍둥이)입니다. 그들의 탄생은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당국은 이 아이들을 놀라운 수입원으로 여기며 이용했습니다. 실제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다섯 자매는 무려 5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습니다.
"우리는 서커스 단에서 원숭이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졌어요." 훗날 디온 자매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구경꾼들이 오생쌍둥이를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도록 특별한 관람 데크가 따로 건설되었고, 1930년대에는 하루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소녀들의 일상을 지켜보았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탄생
이본느, 안네트, 세실, 에밀리, 마리 디온은 1934년 5월 28일 온타리오주 코르베유 마을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인 올리바-에두아르와 엘지르에게는 이미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막내 폴린은 오생쌍둥이보다 겨우 11개월 위였습니다. 이후 부부 사이에서는 아들 셋이 더 태어났습니다.
임신 중이던 엘지르는 쌍둥이를 임신했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신 7개월 만에 다섯 아이를 낳은 것은 그녀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막내 딸이 태어난 지 몇 시간 동안 그녀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완전히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디온 가족
특이한 출산 소식이 주변에 퍼지자 인근 마을의 여성들이 디온 가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버드나무 바구니에 담요와 이불을 넣어 가져왔고, 뜨거운 물병으로 갓 태어난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며칠 후에는 적십자사가 가족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체는 보모와 보육기를 보내주었는데, 그 장비는 무려 30년 전의 낡은 것이었습니다. 더 현대적인 장비를 연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집에 전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
오생쌍둥이 소식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자매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의사들이 각 아이의 체중이 아니라 다섯 아이의 총 체중인 6.7kg만 기록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주최 측이 디온 자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머니(다른 기록에서는 아버지)는 딸들을 공개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계약에 서명했습니다. 그녀를 설득한 것은 출산을 도운 드포 박사와 가족의 고해 신부인 다니엘 루티에 신부였다고 전해집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주최 측의 관심을 받은 디온 자매
디온 부부는 곧 정신을 차리고 계약을 파기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당국은 부모가 다섯 아이를 돌볼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처음에는 적십자사가, 이후에는 캐나다 정부가 자매들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겨우 5개월 만에 소녀들은 가족 농장 맞은편에 새로 지어진 아홉 개 방을 갖춘 저택으로 옮겨졌습니다.
호화로운 감옥
디온 자매는 이 삼중으로 울타리가 둘러쳐진 저택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하루 24시간 돌봄을 제공했고, 자매들에게는 개인 수영장, 놀이터, 자전거까지 있었습니다. "우리는 호화롭게 살았어요. 진짜 낙원 같았지만, 9년 동안 우리가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단 몇 번뿐이었죠." 안네트 디온이 회상했습니다. 부모가 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지 못했어요." 자매들은 훗날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자매들이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습니다. 다섯 아이의 발이 지느러미라는 소문이 퍼지자 당국은 즉시 맨발 사진 촬영을 진행해 소문을 불식시켰습니다. 또한 오생쌍둥이의 일상을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은 입장권만 구입하면 관람 데크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1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이 '명소'를 찾은 관람객은 무려 3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국은 빠르게 자매의 인기를 수익화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오생쌍둥이 인형이 등장했고, 자매의 얼굴은 냅킨, 엽서, 열쇠고리, 각종 제품 포장지에 등장했습니다. 구매 열풍이 워낙 뜨거워 해당 지역에는 기념품 상점만 다섯 곳이 생겨났습니다. 기념품과 입장권 판매로 벌어들인 수익은 약 5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이 돈의 상당 부분은 자매들이 성년이 되면 사용할 수 있는 신탁 기금에 적립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결국 이것은 공약에 불과했습니다. 자매 각각이 실제로 받은 돈은 17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당국은 빠르게 자매의 인기를 수익화했습니다
그동안 올리바-에두아르와 엘지르는 딸들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마침내 아이들이 9살이 되던 해에 성공합니다. 다섯 자매는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어진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따뜻함을 기대했던 자매들은 곧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로 대우받지 못했어요. 하녀이자 노예처럼 취급받았죠." 안네트와 세실은 주장했습니다. 안네트는 덧붙였습니다. "유혹을 향한 욕망은 사람을 괴물로 만듭니다. 그곳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집이었어요."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올리바-에두아르와 엘지르 역시 이전의 보호자들처럼 딸들을 수입원으로만 여겼습니다. 소녀들은 어머니에게 구타를 당했고, 아버지는 딸들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가 신체를 만지는 추행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18번째 생일을 맞은 이본느, 안네트, 세실, 에밀리, 마리는 집을 떠나 가족과 모든 연락을 끊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비극
가정을 떠났음에도 자매들은 오랫동안 심리적 문제와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인으로서의 삶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쇼핑을 하거나 공과금을 내고 지폐를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습니다.

193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디온 자매는 역사상 최초로 유아기를 넘겨 생존한 오생쌍둥이입니다.
에밀리는 수녀가 되었지만 20세에 요절했습니다. 마리는 사서로 일하며 혼자 살다가 36세에 뇌혈관 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머지 세 자매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지만, 1990년대 이혼 후에는 다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에는 이본느가 별세했으며, 현재는 안네트와 세실 두 자매만이 생존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