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의 계획은 단순해 보였습니다. 용맹한 튀튼 기사단만 초대하면, 꾸준히 침입하는 프로이센의 이교도들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공작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수도사들이 곧 폴란드의 적이 아니라 폴란드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거대한 위협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될 것임을요.

중동,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 이후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졌고, 에데사·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키아 공국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기독교인들은 현실적인 난제에 직면했습니다. 어떻게 이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 여기서 등장한 것이 기사단이었습니다. 구호기사단, 성전기사단에 이어 마침내 튀튼 기사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수 세기 동안 튀튼 기사단은 폴란드에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어떤 경로로 동유럽에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튀튼 기사단의 정식 명칭은 '예루살렘 독일인 성모 병원 기사단'입니다. 이름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1128년부터 예루살렘에서 독일인 병원 형제회만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1190년,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기사단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죠. 형제들의 공식 복장은 검은 십자가가 새겨진 흰 망토였습니다.

서약에서 튀튼 기사단은 가난을 맹세했지만, 그들이 만든 조직은 결코 가난해지지 않았습니다. 용감한 수도사들은 아낌없이 후원하는 권력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13세기 초, 기사단은 독일, 보헤미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로렌, 알자스에까지 영지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무렵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습니다. 헨리크 삼소노비치 교수는 저서 『폴란드의 군주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3세기에 들어 성지로 향하는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념은 서서히 기력을 잃어갔고, 주요 기사단의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중동에서 밀려난 수도사들은 신앙을 수호하고 이단자를 소탕한다는 핵심 활동을 위한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습니다.

헝가리에서의 좌절

튀튼 기사단에게 손길을 내민 이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였습니다. 1211년 그는 트란실바니아(오늘날 루마니아의 브라쇼프 인근)에 수도사들을 정착시켰습니다. 흑해 초원을 떠돌던 튀르크계 유목민인 이교도 쿠만족의 공격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긴 것이죠. 기사단은 수많은 특권을 받았습니다. 나무로 성과 도시를 건설하고, 장터를 열며, 광산과 조폐 수익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국왕은 그들의 영지 밖에 크로이츠부르크 성을 세우는 것도 허락했습니다.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십자군 원정이라는 명분이 바닥나자 기사단들은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튀튼 기사단은 어떻게 말보르크에까지 이르게 된 걸까요?

형제들은 운명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적을 효과적으로 격퇴했고, 매우 빠르게 할양받은 지역에 정착해 생활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군주가 준 것에 만족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받으면 손 전체를 노리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언드라시 2세의 동의 없이 통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왕권 관할에서 벗어나 교황의 직속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은 국왕에게 너무나 과한 요구였습니다. 1225년 언드라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기사단령에 진입해 그곳을 유린하고, 성들을 탈취하고, 수도사들을 왕국에서 추방했습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항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동유럽에 수도원 국가를 세우려는 첫 번째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가 튀튼 기사단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꺼냅니다.

이교도의 땅, 프로이센

당시 '프로이센'은 비스와 강과 네만 강 사이의 발트 해안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민족들 역시 '프로이센족'이라 불렸습니다. 포메자니아, 포게자니아, 바르미아, 스칼비아, 야트빙어, 자모기티아, 리투아니아 등 — 이 집단들은 상당히 이질적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점차 통합되고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이웃들에게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13세기 프로이센의 인구는 17만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역 대부분은 삼림으로 덮여 있었고, 부족들의 주된 생업은 농경과 목축, 그리고 물론 약탈이었습니다. 이교도 전사들은 매우 지혜로운 전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적군이 수적으로 우세하면 숲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그리고 침략자가 약탈물을 실어 돌아갈 때, 불쾌한 기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결정적 전투는 숲과 늪지에서 벌어졌습니다. 설령 프로이센족이 패배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공물을 바치고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적군이 그들의 영토를 떠나기가 무섭게 모든 의무를 부인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땅을 정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언제든 즉각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상비군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죠. 그리고 그 상비군이 바로 튀튼 기사단이었습니다.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프로이센족의 위협은 실재했습니다. 콘라트가 도움을 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교도 부족들은 폴란드에 실질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프로이센족은 기독교 군주들의 영토 침공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헨리크 삼소노비치 교수는 『폴란드의 군주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성과 교회, 가옥을 약탈했고, 13세기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마조비아와의] 변경 지대 마을들을 불태웠습니다. 좋은 예가 당시 '엔로바'라 불리던 우트라타 강변의 블로네입니다. 마조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 강을 따라 십여 개의 요새가 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발트족들은 그 요새들을 끊임없이 유린했고, 공국의 국경은 위험할 정도로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콘라트의 청원

콘라트는 어떻게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초대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자신보다 서방에 폭넓은 인맥을 지닌 '수염 있는 헨리크'(헨리크 1세)의 권유에 따른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결심을 마친 콘라트는 1225년 말 또는 1226년 초, 튀튼 기사단 총장 헤르만 폰 잘차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대가로 프로이센 국경에 위치한 헬름노 땅을 기사단에 하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형제들은 달아오른 쇠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1226년 3월,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콘라트의 하사를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는 기사단에게 프로이센 전역을 직접 통치할 권한까지 부여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조항이 실질적 의미가 크지 않았지만, 곧 이것이 정복지에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법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자신들의', 즉 콘라트 공작과 그 후계자들로부터 독립적이고, 신성로마제국에만 예속되는 국가 말입니다.

형식적인 절차를 마친 뒤, 튀튼 기사단은 새 영토로 떠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1226년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두 명의 수도사가 하인들을 대동하고 콘라트의 궁정에 찾아왔고, 떡갈나무 가지로 움집을 지었으며, 그 자리에 나중에 비스와 강변의 첫 요새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이름은 '포겔장(새의 노래)'으로, 토룬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많은 전설이 그렇듯 이 이야기도 실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기사단의 첫 기사들이 비스와 강 하류에 도착한 것은 1228년의 일입니다. 1229년과 1230년에 그들은 콘라트로부터 추가 특권을 얻었고,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교서로 재차 승인되었습니다.

전투, 또 전투

기사단은 프로이센족이 부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헬름노 땅을 장악하는 작업에 기세 좋게 착수했습니다. 훌륭하고 현대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요새를 차례차례 손에 넣었습니다. 이미 1232년에는 헬름노를 장악했고, 2년 뒤에는 옛 주교 크리스티안의 관저였던 라진에 성을 축조했습니다. 이 화려한 성공으로 정복의 첫 번째 단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튀튼 기사단은 정복한 땅에 요새를 세워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림은 1231년 바움부르크 방어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프로이센에서의 전투에서 튀튼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전술을 활용했습니다. 적을 격파한 뒤 성을 쌓고, 병력을 배치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도시를 탈환하려 했지만 대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포위당한 성은 새로운 원정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그 원정군은 대개 적을 완전히 분쇄한 뒤 적영 깊숙이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비스와 강 유역을 장악한 뒤, 형제들은 마조비아 국경을 따라, 이어 발트 해안을 따라 뻗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1237년 해안에 도달했고, 1255년 삼비아 정복으로 해안선 전체가 기사단 손에 들어왔습니다. 내륙 지역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과 통합하면서 리보니아에 대한 주권까지 추가로 얻었습니다.

프로이센의 반란

튀튼 기사단은 점령지에서 공포로 통치했습니다. 정복된 민족을 노예처럼 취급했고, 검으로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일상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새 주인에 맞선 첫 번째 봉기는 1242년 포메자니아 정복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사단에게 도전장을 던진 이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오토펠코 2세였습니다. 그는 갓 싹튼 기사단의 세력을 꺾고 싶어 했고, 프로이센족이 그를 지지했습니다. 서방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등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압도적인 적의 병력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1248년 지에지고니 근처에서 결정적 전투가 벌어져 기사단이 승기를 잡았고, 평화는 1년 뒤 체결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7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 콘라트 공작 본인과 그의 아들들마저 프로이센 측에 섰다는 사실입니다.

튀튼 기사단을 폴란드로 불러들이다 —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왜 국가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내렸는가?

프로이센 반군과 싸우는 튀튼 기사단을 돕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로이센 십자군을 선포했습니다.

두 번째 봉기는 1260년, 자모기티아와의 두르바 전투에서 수도사들이 패배한 직후 일어났습니다. 네만 강과 비스와 강 사이에 살던 모든 부족이 무장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전쟁 첫 5년 동안 이교도 전사들은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수도사들의 편이었습니다.

연합한 프로이센족의 봉기로는 기사단군의 거점 역할을 하는 요새화된 성채들을 함락하고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4세가 새로운 프로이센 십자군을 선포했고, 서방 여러 공국에서도 지원군이 몰려왔습니다. 프로이센족의 저항은 서서히 약해졌고, 마침내 1274년 — 14년의 싸움 끝에 —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 무렵 콘라트 마조비에츠키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가 1247년에 죽을 당시, 그의 '손님'들은 훗날 수도원 국가가 될 땅의 변방 전체를 이미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내륙에는 아직 독립적인 프로이센 부족들이 남아 있었지만요. 그리고 1283년, 즉 폴란드에 도착한 지 약 반세기 만에, 튀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