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전쟁은 언제나 여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다 — 제2차 세계대전 속 폴란드 여성들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그들이 강요당한 시련만큼은 수많은 사람을 무너뜨릴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경과 맞서 싸웠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인 남편과 자식,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 이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

무엇이 이 여성들에게 싸울 힘과 에너지를 불어넣었을까? 바로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놀라운 결의와 용기를 낳았다. 토마시 쿠비츠키는 저서 『여자들의 길(Kobiece drogi)』에서 이렇게 말했다. "곧 깨달았다. 그들이 만연한 악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았다는 것을. 그 안에는 아름다운 도덕적 힘이 있었다. 다만 영웅주의는 아니었다. 그 개념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태어난 것이니까."

마리아 바브지냐크(Maria Wawrzyniak)

처음에는 마리아의 상황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전쟁 중에도 남편과 네 딸이 곁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한 번의 검거 선풍(łapanka)으로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사랑하는 남편 프란치셰크는 독일군에게 붙잡혀 가장 혹독한 강제수용소 중 하나로 끌려갔다. 그녀는 홀로 온 가족의 무거운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맏딸이 겨우 8살밖에 되지 않던 시절, 그녀는 며칠씩 아이들을 두고 나가 독일인 농장주 밑에서 고개 숙여 일해야 했다.

딸들과 함께 방 하나에서 살며, 고용주에게 받은 것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연명했다. 하루 몇 시간씩 땀 흘려 들에서 일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그리고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지역은 제국(라이히)에 편입되었고, 한밤중 침대에서 끌려 나온 폴란드인들은 가축 운반 차량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송되었다. 마리아와 아이들은 자비코보(Zabikowo) 수용소로 향했는데, 거기서 거의 딸들과 떨어질 뻔했고, 이후 강제 노동 현장으로 보내졌다.

굶주림은 늘 그들을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점점 약해졌고, 아이들은 그림자처럼 수척해 갔다. 오스트리아인 농장주의 아내는 절박한 어머니를 뇌물로 넘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마리아에게 딸 하나를 데려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분개하며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과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배로 늘였다. 덕분에 그들은 전쟁을 버텨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여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다 — 제2차 세계대전 속 폴란드 여성들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강제 노동자들 (사진: Bundesarchiv, Bild 146-1994-090-06A, Dumm, CC-BY-SA 3.0 라이선스)

블라디스와바 파프워프스카(Władysława Pawłowska)

블라지아(Władzia)는 장교 야네크의 아내였다. 전쟁이 터지자 남편은 당연히 최전선으로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코지엘스크(Kozielsk)였다. 오늘날 이 지명은 정말 불길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폴란드 군인들이 그곳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블라지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소련군이 점령한 브로디(Brody)의 부모님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NKVD가 밤마다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공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추방이 시작된 것이다. 블라지아와 일곱 살이 되기 전인 아들 옌드루시(Jędruś) 같은 '적대 요소'는 뿌리째 제거될 대상이었다.

운명의 반전 덕분에 아이를 숨길 수 있었다. 찾아온 사람들을 상대로 아이가 발진티푸스로 죽었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블라지아는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콜호스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노동에 내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의 연락이 갑자기 끊겼다… 아내는 편지를 보냈지만 야네크에게서 답신은 오지 않았다.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남편은 분명 더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니까, 자신에게서 수백 킬로미터 떨린 곳에서 일하지만 소식을 전할 수 없을 뿐이라고. 수천 명의 다른 아내들처럼 그녀도 믿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았다. 장교들 누구도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소식이 없다는 것이 곧 좋은 소식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늘 아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 마음이 카자흐스탄 탈출로 이끌었다. 우랄을 넘어 동부에서 '옛 폴란드'라 불리던 국경까지 도달했지만… 그곳에서 쓰러졌다. 체포되어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고, 총탄 아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귀향에 성공했지만, 야네크가 NKVD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여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다 — 제2차 세계대전 속 폴란드 여성들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이 훌륭한 여성들과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벨로나(Bellona) 출판사에서 막 출간된 토마시 쿠비츠키의 『여자들의 길』에서 가져왔다.

마리아 크시슈토포르스카(Maria Krzysztofoporska)

소련군이 리비우(Lviv)에 진입하자 거대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강간, 체포, 잔혹한 가택 수색, 추방. 도시 사람들은 단 하룻밤도 평온하게 잘 수 없었다. 이 광기의 한복판에 1939년 중반 리비우에 부임한 재무부 고위 관료 지그문트가 있었다. 이윽고 그의 아내 마리아가 자녀들인 아니아, 지우니아, 그리고 어린 보이투시와 함께 도착했다. 함께 온 것은 갓난아기 보모와 프랑스어 가정교사였다.

전쟁이 닥치자 그들은 도시를 빠져나가 독일 점령 지역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랄 산맥 어딘가에 처박힌 초라한 정착지로 보내질 예정이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평범함의 대체물이라도 만들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지그문트를 찾아온 NKVD가 다시 그들의 문을 두드렸다. 수색 과정에서 그가 스파이라는 '철증'이 발견되었다. 무엇이었을까? 소플리초보(Soplicowo) 지도가 삽입된 『판 타데우시(Pan Tadeusz)』 사본이었다. 비록 특별 사면이 이루어져 마리아가 유배지를 떠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남편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험난한 여정에 나섰고, 점점 쇠약해지면서도 막 결성되려는 폴란드군에 도달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러나 여정에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비극을 마주했다. 탈진과 영양실조, 병이 두 아이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마리아 역시 수개월의 방황 끝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거의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작은 딸 하나와 함께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지그문트 또한 살아남았다. 폴란드-소련 관계의 짧은 해빙기를 이용해 석방되었고, 가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여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다 — 제2차 세계대전 속 폴란드 여성들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

전쟁 중 폴란드인들은 내일을 확신할 수 없었다.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언제든 그들을 조국에서 추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바르타 지역에서 추방된 폴란드인들 (사진: Bundesarchiv, R 49 Bild-0131, Wilhelm Holtfreter, CC-BY-SA 3.0 라이선스).

에밀리아 쿠나비치(Emilia Kunawicz)

1941년 중반, 에밀리아는 출산을 막 마친 시기였고, 국경 지대(Kresy)에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스탈린을 공격했고, 전선이 먼저 그녀의 세계를 휩쓸었다. 독일군이 들어오자 짐승 같은 폭력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유대인 학생 한 명이 오만한 독일군에게 머리카락을 잡혀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1942년, 남편과 아들이 제국으로 강제 노동을 위해 끌려가자,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많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들의 뒤를 따른 것이다.

자원 강제 노동자로서 그녀는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 채 독일행 길에 올랐고, 분뇨와 피, 인간의 불행이 뒤섞인 화물차의 불편을 참아내며 이동했다. 남편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토마시 쿠비츠키는 저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열흘 남짓의 방황 끝에 그녀는 피오트르 앞에 섰다. '왜 왔어? 여기는 끔찍한 곳이란 말이다!' 그가 답했다." 노동은 지옥이었다. 농장주는 노예들을 무참히 착취했고, 이 노예들은 굶주린 채 혹한이든 폭염이든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게다가 에밀리아는 갓난아기를 숙소 유모차에 하루 종일 홀로 두고, 심지어 묶어두고까지 일해야 했다.

노동에 자원한 신분이면서 동시에 독일어를 할 줄 알았기에, 그녀는 슬픔을 종이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관청에 항의 서한을 제출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리케인 같은 역풍으로 돌아왔다. '피의 개(Bloody Dog)'라 불리는 게슈타포가 몇 명의 부하와 함께 농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그 '불손한' 항의를 처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일할 힘이 남지 않을 만큼 굶주린 상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소리 내어 한 폴란드인은 고문을 당했고 며칠 뒤 사망했다. 항의서의 작성자 에밀리아는 다하우(Dachau) 행 대상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키 175cm에 몸무게 46kg까지 빠진 그녀는 곧 독일 의사로부터 암 진단을 듣게 된다. 딸은 완전한 정신적 붕괴를 겪으며 무감각 상태에 빠졌고, 남편은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그녀와 가족들은 전쟁을 버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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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여성들의 이야기는 토마시 쿠비츠키의 『여자들의 길』을 바탕으로 했다. 용기와 강인함, 그리고 위대한 결의 덕분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움에서 승리한 이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전쟁은 언제나 여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다 — 제2차 세계대전 속 폴란드 여성들의 감동적인 실화 4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