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1월 봉기와 1월 봉기, 폴란드 국민 봉기는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11월 봉기와 1월 봉기를 경건한 존경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두 봉기는 실패했지만, 조상들은 불균형한 전쟁에서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역사학자 마레크 레즐러(Marek Rezler)는 “그렇다”고 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마레크 레즐러는 대폴란드(Wielkopolska) 지역의 역사를 다룬 여러 저서의 저자로, 최근에는 1918~1919년 성공적인 봉기를 조명한 단행본을 통해 이 지역이 자유를 쟁취하는 데 기여한 바를 분석했다. 새 책 『1918 폴란드 독립』에서 이 역사학자는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최상급의 찬사를 붙이기 어려운 봉기들을 다룬다. 그의 평가는 단호하면서도 신선하다. 다른 역사학자들이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그는 과감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싸움이었나?

“11월 봉기와 1831년 폴란드-러시아 전쟁은 흔히 아름답고 영웅적이며 무엇보다 낭만적인 전쟁 서사시로 인식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감정적 접근에서 비롯된 용서받기 힘든 실수들의 연속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레즐러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 첫 번째 대규모 봉기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봉기의 근본 전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빈 회의 이후 초년에 러시아 분할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들의 처우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았고, 탄압도 그리 가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1월 봉기와 1월 봉기, 폴란드 국민 봉기는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마르친 잘레스키(Marcin Zaleski), 「무기고 점거」, 1830년

“폴란드 왕국의 관료들에게는 상당한 행동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고 레즐러는 강조한다. “물론 폴란드 독립 음모에 대한 끊임없는 박해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화의 수준은 높아져 갔다. 콘스탄티 드루츠키-루베키(Konstanty Drucki-Lubecki)의 활동은 국가 재정과 경제를 점차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치(Stanisław Staszic) 신부의 주도로 광업도 발전했다.” 게다가 폴란드 왕국은 공식적으로 폴란드군이라 불리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무장이 잘 갖춰지고 고수준으로 훈련된 부대였으며, 나폴레옹 시대 출신 장교들, 심지어 러시아군과 직접 싸워본 참전 용사까지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필연적인 패배였나?

오늘날 이 결론은 다소 놀랍게 들릴 수 있다. 레즐러는 1820년대와 1830년대가 교차하던 시기에도 “내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폴란드인의 자치를 강화할”, 즉 폴란드인의 민족적 처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기회가 여전히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희망은 사관학교에서 시작된 음모가 전쟁을 촉발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프랑스나 영국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양국은 러시아를 자극하고 그 배타적 세력권을 침범할 생각이 없었다.

“봉기는 구체적인 계획도 지휘 체계도 없이 시작되었다”고 레즐러는 결론짓는다. “11월의 밤에 사관생도들의 봉기에 반대했던 장군들(이 선택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은 엄격한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옳았다.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11월 봉기와 1월 봉기, 폴란드 국민 봉기는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러시아의 군사적 우위는 압도적이었다. 정치적으로도 급진파들이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이를 거부하면서 모든 것이 잃어버렸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도, 즉 바르샤바로 진군한 이반 파스케비치(Ivan Paskievich) 원수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임으로써 국민적 양보의 잔재라도 지킬 수 있었던 순간에도, 강경파들은 한 걸음의 물러섬조차 거부했다. 그 결과 폴란드 의회와 군대, 대학은 해체되었다. 상실은 완전했다. 그러나 마레크 레즐러는 또 다른 대봉기, 즉 1863년 1월에 일어난 봉기의 주도자들에게는 한층 더 신랄한 비판을 보낸다.

예상치 못한 결과?

“1월 봉기의 기록은 영웅적 행위, 민족의 순교, 그리고 다시 한번 ‘증언’이 되겠다는 필사적인 투쟁에 대한 극적인 묘사로 가득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전한 독립 쟁취는 현실성이 없었다.” 『1918 폴란드 독립』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노골적으로 덧붙인다. “목표 중 하나도 달성되지 않았다.”

봉기 진영은 농민 해방령을 선포하며 폴란드 농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농민들은 “누구의 문서가 더 믿을 만하고 확실한지 빠르게 따져 본 뒤” 자신들에게 토지를 약속하기까지 한 차르의 편에 섰다. 외부의 지원도 이곳저곳에서 약속이 오갔음에도 끝내 오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폴란드 문제에 대한 지지가 표명되었지만 구체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교황 비오 9세는 봉기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레즐러는 설명한다.

11월 봉기와 1월 봉기, 폴란드 국민 봉기는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에비치(Stanisław Witkiewicz)의 그림에 묘사된 교수형 집행 장면, 1월 봉기 참가자들

저자의 견해로는, 다시 한번 무의미한 돌진이 조직되었고 이는 폴란드 왕국의 제한적 자치조차 유지하려던 희망과 탄압 철회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짓밟은 행위였다. 긴장 완화 대신 진압된 봉기는 최악의 테러의 시대를 불러왔다. 폴란드 왕국 자체도 사실상 해체되어 ‘비스툴라 변경주(Vistula Land)’로 개칭되었고, 차르주의에 엄격히 종속되는 제국의 한 주로 전락했다.

봉기가 간접적이고 거시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레즐러의 견해로는 그것은 단 하나,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봉기 과정에서 깨졌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폴란드인들에게 유럽이라는 체스판 위에서 정말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의 통치자 나폴레옹 3세는 봉기에 대한 지지를 확언했지만 정작 전쟁에는 뛰어들지 않았다. 러시아가 동맹에서 이탈한 사실은 파리의 국제적 위상을 명백히 약화시켰고, 독일의 급속한 통일을 막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었다. “그때의 우연한 사건들이 눈사태로 변했다”고 레즐러는 강조한다. “1864년 프로이센은 덴마크를, 2년 뒤에는 오스트리아를, 그리고 1870년에는 프랑스를 격파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 방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1월 봉기가 열어준 문이었다.”

출처

이 글은 마레크 레즐러의 저서 『1918 폴란드 독립』(포즈난 출판사, 2018)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