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단 며칠의 각료 생활, 폴란드 최초의 여성 장관 이레나 코스모프스카

그녀는 당대 폴란드 여성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경력은 단 며칠에 불과했다. 이레나 코스모프스카는 누구였으며, 과연 무엇을 이루어냈을까?

이레나 코스모프스카(Irena Kosmowska)는 이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바르샤바의 우아한 살롱 대신 농민들의 초가집에서 이름을 알렸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리비우(Lwów)에서 공부한 뒤, 그녀는 즉시 쿠트노(Kutno) 근방의 시골 여학교 교사로 나섰다. 어디에든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농민들을 위한 강좌를 열고 도서관을 세웠으며, 지주 협회와 농업순회협회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언제나 권력의 골칫거리로 남았다.

반성직자 급진파

1908년부터 그녀는 민중을 위한 주간지 『자라니에(Zaranie)』의 공동 편집자로 일했다. 이 잡지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중 하나였다.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필체는 차르 관료들뿐 아니라 성직자 계급의 심기를 건드렸다. 편집부는 성직자야말로 농민을 억압하는 커다란 세력이며, 신부들이 평민을 속여 돈을 빼앗는다고 거듭 주장했다. 결국 주교는 편집부는 물론 잡지 독자들에게까지 저주를 내렸고, 『자라니에』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은 '종교적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놀랍도록 인기 있는 이단이었다. 잡지는 약 5만 명에게 읽혔다고 전해진다.

단 며칠의 각료 생활, 폴란드 최초의 여성 장관 이레나 코스모프스카

1908년 『자라니에』의 머리장식 삽화

코스모프스카는 『자라니에』에서 문화·교육 부문을 총괄하고 편집국 비서를 맡았으며, 독자 소통과 두 종류의 부록 발행까지 담당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야심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그녀는 비스피안스키(Wyspiański)의 희곡 『혼례』를 다룬 소책자를 출판했고, 이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요새형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감옥 생활을 비웃듯 보냈지만, 활동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미래 정부의 씨앗을 함께 만들다

그녀는 폴란드 독립당 연합 임시위원회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이 연합은 애국적 성격을 띤 정당 간 협약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국민정부로 발전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이미 1912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를 폴란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바 있었다.

임시위원회가 출범하자마자 그녀는 군용 구호 여성연맹에 합류하여, 러시아 점령지역에서 독립투쟁을 이끌 여성 기반을 준비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실제로 시작되자 비밀결사인 폴란드 군사조직(Polish Military Organization)의 대열에 들어섰다.

단 며칠의 각료 생활, 폴란드 최초의 여성 장관 이레나 코스모프스카

폴란드의 독립을 이뤄내고, 스스로도 자유와 참정권, 그리고 언제나 박탈당해 온 존엄을 쟁취한 여성들의 운명을 확인해 보자. 카밀 야니츠키(Kamil Janicki)의 신간 『불굴의 숙녀들(Niepokorne damy)』이 현재 판매 중이다!

모스크바행 열차

1914년, 그녀는 차르 체제에 대한 폴란드 우파의 유화적 태도에 항의의 신호를 보냈다. 그 대가로 체포되어 바르샤바에 수감되었고, 독일군이 도시로 접근하자 모스크바로 호송되었다. “열차 안에서 포격을 받으며 열흘을 보냈습니다”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이후 그녀는 타간카(Taganka) 감옥의 좁은 감방에서 5개월을 보냈다.

코스모프스카의 공적과 활동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녀는 폴란드 전쟁희생자 구호 협회에서 활동했고, 1917년에는 적십자 사절단의 일원으로 핀란드와 스웨덴을 방문했다. 또한 옛 『자라니에』 인맥을 토대로 창당된 새 정당, 폴란드 인민당 '해방(PSL Wyzwolenie)'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당의 첫 전당대회를 직접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 경력의 가장 영예로운 무대—적어도 공식적으로는—가 1918년 11월에 열렸다.

새로운 경력의 장

1918년 11월, 점령국의 행정 체계가 무너진 틈을 타 이그나치 다신스키(Ignacy Daszyński)가 루블린에서 인민정부를 선포했다. 코스모프스카는 이 정부에 사회복지차관 겸 선전차관으로 입각했다. 물론 선전 분야에서 그녀는 농민 대상 선동 업무를 담당했다.

단 며칠의 각료 생활, 폴란드 최초의 여성 장관 이레나 코스모프스카

스타니스와프 렌츠(Stanisław Lentz)가 1919년에 그린 이그나치 다신스키 초상화

그녀는 재건된 폴란드 최초의 정부에서 유일한 여성 각료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마지막이 될 것임이 드러났다. 전간기 내내 어떤 내각에도 폴란드 여성이 장관직을 맡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코스모프스카의 눈부신 승진은 다신스키 정부 전체와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뒤 정부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게 권력을 넘겼고, 다신스키 내각은 폴란드 영토의 작은 부분조차 통치하지 못한 채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활동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로 다신스키 정부가 폴란드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을 부여한다고 처음 공식 선언한 정부였다. 그리고 오늘날 이 결정에 이레나 코스모프스카 역시 기여했으리라는 이야기가 자주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