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굶주린 폴란드인이 기대었던 법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는 폐허가 된 농업 국가로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카롤 칠라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인구의 3분의 2가 농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는데, 인구 구조상 이 숫자는 명백히 너무 많았습니다.
문제는 농장 하나하나에도 있었습니다. 대다수 농가의 경작 방식이 낙후되어 생산량은 저조했고, 규모 자체도 상황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전체 농가의 65%는 5헥타르를 넘지 않았으며, 이들이 차지한 토지는 폴란드 전체 농경지의 겨우 15%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땅은 거대한 대농장(라티푼디움)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분할 지배 시대의 낡은 제도와 관행도 여러 지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과밀화된 농가, 파편적으로 쪼개진 비효율적인 경작지, 구식 농법으로는 농부 가족을 먹여 살리기조차 벅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부흥은 요원한 꿈처럼 보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국가가 다시 일어서려면 무엇보다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토지를 달라!"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중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작업은 1917년에 시작되었고, 1918년 11월 7일 루블린에서 수립된 이그나치 다신스키의 임시 인민정부 역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마리아 모치들로프스카 (사진: 퍼블릭 도메인)
당시 발표된 방침은 대·중규모 대지주들의 토지를 징발해 정부의 관리 아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의 최종적인 모습은 입법 세임(의회)에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폴란드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 법안은 곧바로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각 정당은 폴란드 농촌이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하는지, 어떤 농업 구조를 가져야 하는지, 소규모·중규모·대규모 중 어떤 농장을 육성해야 하는지 두고 자신들의 비전을 밀어붙였습니다.
입법 세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농민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대한 빠른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7월 10일 표결이 예정되었고, 각 정당은 소속 의원들에게 자신들이 선호하는 안에 표를 던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민인민연합 소속 의원이었던 마리아 모치들로프스카는 자기 당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양심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가 비흐니크가 저서 『포셰우키, 최초의 여덟 명의 여성』에서 짚어주듯, 그녀의 당은 대지주 계층과 이해를 함께하고 있었고,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재산 축소에 절대 동의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에는 토지에 대한 필사적인 갈망이 차올랐습니다. 모치들로프스카는 강요된 당론에 굴복하는 대신, 동료 의원들을 그들 자신의 무기로 무너뜨리기로 결심합니다.
"신선한 공기를!"
처음부터 남성 의원들은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여성 동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여성 의원들이 곧 삐진 마음을 거두고 물러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한 신부 출신 의원은 아예 "숙녀들은 냄비 앞에나 어울린다"며, 세임 활동이 여성들에게서 가사 의무를 다할 힘마저 빼앗아 간다고 공언하기까지 했습니다.

낡은 집 옆에 선 사르나 지역의 한 여성.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당시 인구의 상당수가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은 공직을 감당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믿었다면, 그 편견을 역이용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마리아 모치들로프스카는 당론에 반하는 표결이 진행되기 직전, 회의장에서 기절하는 연기를 해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놀란 의원들이 그녀를 신선한 공기를 쐬러 밖으로 데려갔고, 그녀는 표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승부수는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토지개혁법이 단 한 표 차이로 통과된 것입니다. 바로 모치들로프스카가 던지지 않은 그 한 표 덕분이었습니다.
2년 후 그녀는 비슷한 묘기를 다시 선보입니다. 그녀가 지지하는 1921년 3월 헌법 채택에 소속 교섭단체가 반대하자, 표결 도중 "긴급한 용건"이 있다며 자리를 비켜버린 것입니다.
농업법은 채택된 원래 형태 그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농민들이 볼셰비키의 침공으로부터 폴란드를 지켜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920년 8월, 실제로 조국을 구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