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페루 좌익 게릴라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의 역사: 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

7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을 일으켰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폭탄을 설치했다. 페루 좌익 게릴라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의 이야기.


라틴아메리카는 수많은 좌파 게릴라의 요람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사 독재정권과 그에 따른 극심한 빈곤은 사회적 저항을 낳았고, 그 저항은 무장 투쟁 조직화라는 출구를 찾았다. 문제는, 오랜 무위의 투쟁에 지친 일부 게릴라들이 숭고한 이상에서 벗어나 단순한 산적 행위나 마약 거래로 타락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조직이 있었다. 페루의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 Sendero Luminoso)'은 가장 극단적인 폭력성과 급진주의,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를 보여준 조직이었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의 등장

이야기는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단순하다. 페루에는 공산당이 존재했고, 1964년 그중에서 마오주의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아비마엘 구스만(Abimael Guzmán)과 그의 열여섯 명 동료들에게는 이 '페루 공산당 – 붉은 깃발(Partido Comunista Peruano – Bandera Roja)'조차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다. 결국 1960년대 말, 그들은 또 한 번의 분열을 결심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페루 공산당 – 빛나는 길'이다. 당명은 슬로건 중 하나인 "빛나는 마리아테기의 길을 따라"에서 유래했다. 마리아테기(Mariátegui)는 페루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페루 좌익 게릴라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 의 역사: 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

구스만은 '당과 혁명의 수장'이 되었고, 운동의 대표 슬로건 중 하나는 "권력 외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였다.

1970년대 내내 빛나는 길은 자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끝내 대중 조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구성원은 기껏해야 수백 명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념은 갈수록 급진적이고 편집증적으로 변해갔다. 1979년, 빛나는 길(센데리스타라고도 불린다)의 구성원들은 무장 투쟁 개시를 결정했다. 다음 해 그들은 첫 번째 군사 행동을 감행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폭력 행위가 뒤따랐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먼저 전사들을 이끈 이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공산주의, 더 정확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재해석된 마오주의였다. 빛나는 길 이념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앞서 언급한 아비마엘 구스만, 별명 '곤살로 대통령(Presidente Gonzalo)'이었다. 소규모 게릴라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개인숭배의 규모는 스탈린 치하 소련이나 마오 치하 중국에 견줄 만했다.

빛나는 길의 선전은 그를 "세계 최고의 생존 마르크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의 네 번째 검"(마르크스, 레닌, 마오에 이어)이라 불렀다. 때로는 '곤살로주의'를 마르크스 이론의 창조적 발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구스만에 따르면 이상적인 사회는 시장 메커니즘에서 배제되고 자급자족하는 농민 코뮌의 연합이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센데리스타들이 실제 통제한 지역에서조차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비전이었다.

페루 좌익 게릴라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 의 역사: 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

마오 역시 게릴라들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다. 1980년 12월 26일 리마에서 벌어진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페루 수도의 주요 거리에 있는 가로등에 길 잃은 개들의 시체를 매달고, "덩샤오핑 개자식(Teng Hsiao-Ping hijo de perra)"이라 적힌 팻말을 함께 붙였다. 이는 마오주의 정통에서 이탈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에 대한 항의였다. 과연 중국 본토에서 이 소식을 접한 사람이 있었을까?

빛나는 길과 농민 사이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마오주의자들에게 농민 계층은 혁명의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상 완벽해 보였던 것이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학살과 고문의 일상

센데리스타들의 본거지는 안데스 산악 지역 아야쿠초였다. 인구 밀도가 낮고, 보수적이며, 가난한 땅이었다. 그곳의 일부 오지 마을에서는 게릴라들이 이미 1982년에 농산물 판매와 인근 마을과의 교역을 위한 장터 개최를 금지했다. 당연히 이러한 통제가 주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농민들의 불만은 빠르게 커져갔다.

이를 억누르기 위해 빛나는 길은 극도로 잔혹한 방법에 의존했다. 어떤 형태로든 비판을 표현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처벌 대상이 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게릴라들에게 목이 잘리거나 돌로 머리를 깨졌다. 그들 스스로의 변명으로는 "탄약을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 목격자는 농작물 배분의 불공정을 비판했던 여성의 사례를 증언했다. 인민법정은 그녀에게 50대의 채찍질을 가하고 머리를 민 것이다. 비슷한 '죄'를 지은 한 남자 역시 50대의 채찍질에 더해 귀가 잘렸다. 정보원 혐의를 받던 우체국 직원은 보복의 일환으로 거세당했고, 심지어 혀까지 잘렸다.

페루 좌익 게릴라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 의 역사: 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

1980년대와 그 이후 초기까지 빛나는 길의 구성원들은 학살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루카나마르카 학살이다. 1983년 4월 3일, 80명의 센데리스타 무리가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해 총 69명을 살해했다.

이러한 만행에 대한 저항은 당연히 일어났다. 농민들은 자위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길은 사회적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주민 강제 이주를 감행했다. 그 결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통제 아래 묶여 있었다. 이주민 수용소의 실태는 참혹했다. 사람들은 플라스틱 천막에서 생활했고, 식량 공급은 늘 부족했다. 소금, 설탕, 신선한 채소조차 구하기 어려웠고, 많은 이들이 굶주렸다. 1993년 10월 군이 이런 수용소 하나를 접수했을 때, 모든 수용자가 빈혈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부는 결핵, 기관지염, 말라리아까지 앓고 있었으며, 일부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빛나는 길의 몰락

1990년대 초 빛나는 길이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종말은 갑작스럽고 예상 밖의 방식으로 찾아왔다. 1992년 9월 12일, 아비마엘 구스만이 게릴라 지도부의 일부와 함께 체포된 것이다. 자유로이 남아 있던 게릴레로스가 테러 활동을 이어가려 했지만, 예전 같은 추진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곤살로 대통령'은 수감된 직후 곧 정부와의 협상을 촉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수많은 대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군대 역시 전략을 전환했다. 안데스의 모든 농민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던 관행이 사라지면서, 국민의 군에 대한 신뢰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빛나는 길은 갈수록 타락하여 시간이 지나며 흔한 범죄 집단이자 마약 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오늘날에도 조직은 존재하며 간헐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만, 1980년대의 테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