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폴란드에서 고속도로 공사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상황은 무려 2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분할 지배 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철도 건설(철도는 어떤 의미에서 19세기판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낯익은 각종 어처구니없는 일과 난관들이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권은 차르의 손에
폴란드인들은 생각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철도 노선이 운행을 시작하자마자 국내 투자자들은 황금 같은 장사거리를 감지했다. 1834년, 즉 최초의 증기 기관차가 스톡턴~달링턴 구간을 달린 지 불과 9년 후, 피오트르 슈타인켈레르와 폴란드 은행 부총재 헨리크 루비에니스키라는 두 명의 금융업자가 바르샤바에서 자그웨비에 돕브로프스키에(석탄 산업 지역)를 거쳐 빈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에 대한 예비 조사 작업을 의뢰했다. 1년 뒤에는 엔지니어 스타니스와프 비소츠키가 제안한 두 가지 설계안 중 더 유망한 쪽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골치 아픈 일들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인들이 마음껏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는 분할 지배 시대였고, 게다가 실패로 돌아간 11월 봉기 직후였기 때문이다. 철도 건설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차르 니콜라이 1세 한 사람의 손에 있었다. 군주의 동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는 아직 철도 노선이 하나도 없었고, 차르는 폴란드인들의 독립 투쟁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바르샤바에서 자그웨비에로 이어지는 철도는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 문명화된 유럽으로 향하는 것이지 러시아의 오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피오트르 슈타인켈레르, 폴란드 최초 철도 노선 구상의 주창자 중 한 명.
실제로 왕국의 자문관들은 거의 입을 모아 폴란드 왕국 내 철도 건설에 반대했다. 러시아 재무장관 예고르 칸크린은 철도란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도록 부추길 뿐인 불필요한 사치품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기까지 했다(인용 출처: 안제이 조르, 『크로넨베르크. 행운의 역사…』, 173쪽).
비관론자들이 단 하나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니콜라이 1세 본인이 새로운 발명품의 열렬한 애호가라는 점이다. 철도에 대한 개인적 꿈과 참모진들의 반대 의견 사이에서 갈등하던 차르는 결국 바르샤바 공작 겸 폴란드 왕국 총독 이반 파스케비치에게 결정을 맡겼다. 파스케비치는 짧은 숙려 끝에 관련 칙령에 서명했다. 그 결과 — 아이러니하게도 — 폴란드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가져온 문명의 도약을, 11월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고 폴란드성을 탄압하며 러시아화를 강요했던 바로 그 인물에게 빚지게 되었다.
나머지는 투자자의 몫…
이 단계에서 문제는 다시 구상자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국가는 오늘날 민관협력(PPP) 방식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선 투자에 대한 승인만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반 파스케비치가 폴란드 왕국에 철도 건설이라는 문명의 도약 기회를 열어주었다. 11월 봉기를 잔혹히 진압하고 폴란드성을 탄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초기 공사 비용은 당시 화폐 기준 2,100만 즈워티로 추산되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주식 5,000주가 발행되어 잠재 투자자들에게 판매될 예정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폴란드 은행이 배당금을 더해 이 주식들을 매입함으로써 철도가 국가 소유로 넘어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피오트르 슈타인켈레르와 헨리크 루비에니스키는 자신들의 구상이 얼마나 인기를 끌지에 대해 계산을 잘못했다. 처음에는 참여 의향이 있는 사람이 부족하여 바르샤바-빈 철도회사 설립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여러 편법이 동원되었다. 예컨대 주식 1,500주가 영국 회사 '폰트윈 앤드 골리너'에 넘겨졌는데, 이 회사는 그 대가를 물물교환으로 치르기로 했다. 즉 레일 14,000개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침내 1839년 회사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공사가 착수되었다. 『크로넨베르크. 행운의 역사』의 저자 안제이 조르에 따르면, "1840년에는 토목 공사, 삼림 벌채, 성토 준비에 집중되었다. (…) 그러나 자금이 부족했다"(178쪽).
열차를 끄는 것은… 말?
재정난과 전반적으로 불리한 투자 분위기 속에서 피오트르 슈타인켈레르와 헨리크 루비에니스키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같은 이유로 교차로 있는 고속도로('기에루프카')를 건설하기로 했던 에드바르트 기에렉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19세기 자본가들은 그보다 훨씬 과감했다.
폴란드 최초 철도의 초기 운행 시간표 중 하나! (1845년)
그들이 제안한 것은 열차를 기관차가 아니라 정직한 말들이 끌자는 것이었다. 헨리크 루비에니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나라에서 귀리와 건초는 워낙 싸고, 말값도 그만큼 저렴해서 (…) 증기 기관차보다 말로 [화물을] 훨씬 저렴하게 운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 운송 방식을 어떻게 할지, 걸음으로 할지 속보로 할지 생각해야 한다. 말이 걷는 속도로 끌면 더 느리다는 것은 논외다."(176쪽)
다행히도 이 기이한 '말 철도' — 어느 모로 보나 철도라고 부를 수 없는 방안 — 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국가 당국이 임명한 특별 위원회가 '증기 기관차' 방식의 시행을 강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사업 전체의 구상자들은 비용을 완전히 잘못 산정했고, 이제 비용은 2,100만에서 3,000만으로 늘어났다.
투자자가 공사장을 떠나다…
다음 단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철도 투자자 중 하나인 빈의 슈타이너 은행(Steiner et Companie)이 파산했다. 이어서 러시아 통치 엘리트와 폭넓은 인맥을 가진 산업가 마우리치 코니아르가 이반 파스케비치를 설득해 영국과 맺은 레일 공급 계약을 파기하게 만들었다. 이제 당국의 결정에 따라 레일은 코니아르의 공장에서 부풀려진 가격으로 생산되어야 했다. 여기에 왕국 정부의 신규 주식 발행 기피 현상까지 겹쳤다.
공사가 마침내 완공되었을 때 바르샤바-빈 철도 열차를 끌었던 기관차들.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고 바르샤바-빈 철도회사는 영업을 종료했다. 애초에 이 회사는 깡통 회사처럼 운영되었다. 주주총회를 거의 소집하지 않았고 실제 사옥조차 갖추지 못했다.
국가가 투자를 인수하다
공사가 이미 너무 진행된 상태여서 프로젝트를 완전히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국가는 마지못해 이를 인수했다. 자산 목록 작성에만 2년이 더 걸렸고 공사가 재개된 것은 1844년이 되어서였다. 그동안 추산 비용은 4,600만으로 늘어났다. 실질적으로는 5,000만을 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침내 1845년 초, 바르샤바에서 그로지스크까지 이어지는 최초 29km 구간이 영업을 시작했다. 전체 공사는 1848년 4월에 완료되었는데, 이때 328km 길이의 철도 노선이 러시아 분할 지배 지역의 경계까지 도달했다.
물론 국가가 운영한 철도는 완전히 적자였고, 이는 이후 수년간 인프라 발전을 저해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아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경악스럽게 여기는 것은, 차르의 탄압과 각종 배후 거래, 부패, 투자자 부재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빈 철도가 제3공화국(현대 폴란드)의 대부분 고속도로보다 훨씬 빨리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출처:
기본 자료:
- 안제이 조르, 『크로넨베르크. 행운의 역사』, 폴란드 과학 출판사 PWN, 2011.
보충 자료:
- W. 스테르너, 『철도의 탄생』, 북 앤드 노울리지,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