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농장은 왜 청산되었는가?
국영농장(PGR)은 왜 청산되었을까? 이념적인 문제도 결코 작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국영농장이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과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구 국영농장 토지의 대부분은 가톨릭 교회로 넘어갔고, 나머지는 개별 농민에게 임대되었다. 동산은 사실상 약탈당하다시피 했다.
통념과 달리 국영농장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파산한 것이 아니었다. 1991년 10월 19일 제정된 '국고 농업재산 관리법'에 따라 정부가 위에서 일방적으로 청산을 단행한 것이다.
1990년 기준 국영농장에는 약 39만 5천 명이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 중앙통계청(GUS) 자료에 따르면 1991년 총 1,520개 국영농업기업 가운데 1,152곳이 적자를 기록했지만, 3곳은 손익분기점을 지켰고 365곳은 순이익을 냈다. 즉, 전멸 수준의 경영 실패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국영농장은 농업 부문 전체와 마찬가지로 발체로비치의 충격요법, 특히 대출 금리의 급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농장을 문닫을 경제적 이유는 없었다. 하물며 모든 농장을 한꺼번에 없앨 이유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영농장의 자산은 국고 농업재산청(AWRSP)으로 이관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연이은 정부들은 급격히 불어나는 가톨릭 교회의 배상 청구를 충족시킬 재원을 찾고 있었다. 국영농장의 자산은 각종 '보상'을 위한 풍부한 원천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국유 토지의 대부분은 교회로 흘러갔고, 상대적으로 적은 몫은 개인에게 임대되어 대규모 농장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술주정뱅이, 게으름뱅이, 도둑
이 모든 대가는 국영농장 종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치렀다. 하룻밤 사이 약 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대체할 일자리 하나 없이 말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농장 청산의 후유증은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낙후의 과정은 PKS(공영여객운송) 청산을 통해 많은 농촌 지역의 대중교통마저 사라지면서 — 이 역시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었다 — 완성되었다.
여론이 이러한 조치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이들을 비인간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게으름뱅이, 도둑, 술주정뱅이라는 병리적 존재로 그려낸 것이다. "어차피 다 마셔버릴 텐데 뭐 해주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들의 존엄마저 빼앗긴 순간이었다.

여론은 이런 서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구 국영농장 주민들을 타락한 사람들로 묘사한 영화 '아리조나(Arizona)'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의 주도자들은 사소한 성찰조차 여유가 없어 보인다. 2017년, 비엘레츠키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야체크 시비츠키는 가제타 비보르차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국영농장에 노동 윤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거기엔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그의 답은 "절망, 절도, 음주"였다.
국영농장에서 자란 세대는 몇 년 전부터 이 '검은 신화'를 벗겨내는 데 앞장섰다. 사회적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언론에도 관련 보도가 이어졌다. 2018년에는 요안나 바레하의 다큐멘터리 'PGR의 초상(PGR Images)'이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바르미아·마주리 지역에서 농장 청산 이후 사람들의 삶을 조명했으며, 감독은 자신의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하기도 했다.
PGR, 단순한 직장 그 이상
국영농장은 1949년에 설립되었다. 핵심 목표는 주로 도시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농업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인농은 극도로 영세하게 분할되어 있었고, 농가의 상당수가 상업적 기능보다 사회적 기능에 더 가까웠다.

국영농장은 주로 국토의 서부와 북부에 설립되었다. 1980년 기준으로 폴란드 전체 농경지의 18.5%를 관리했다. 농장에는 연구소를 포함해 농업 분야의 우수한 전문 인력들도 고용되어 있었다.
국영농장이 준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었다. 직원들의 주거를 책임졌고, 유치원과 때로는 학교까지 운영했으며, 아이들의 통학 차량 운행과 추가 급식 제공, 보육실·클럽·소방대 운영까지 맡았다. 지역 도로 보수나 배수 사업 등 지역 기반 시설 유지에도 관여했다. 국영농장은 하나의 작은 사회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