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브와디스와프 야기우워(Władysław Jagiełło), 폴란드 왕관을 쓰기 전까지의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

폴란드의 관점에서 보면 야기우워의 정치 인생은 1386년, 크라쿠프에 도착해 세례를 받고 왕좌에 오르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을 했을까요? 짐승 가죽을 걸치고 창 한 자루 들고 숲속을 뛰어다니며 이교 신상 앞에서 기도하던 미개한 군주였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야기우워는 여러 차례의 고비를 몸으로 넘겨온 노련한 정치가이자 음모의 달인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역사 서술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야기우워는 올기르트(Olgierd)의 아들이었습니다. 올기르트는 동생 케이스투트(Kiejstut)와 권력을 분점하며 20년 넘게 리투아니아를 다스린 무인(武人) 대공이었죠. 야기우워는 1377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많은 폴란드 역사학자들은 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15세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해낸 일들과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보여준 과감함을 생각하면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야로스와프 니코뎀(Jarosław Nikodem)의 견해를 따라, 적어도 몇 살 더 많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원기 왕성한 스무 살 초반의 청년은 즉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 야기우워(Władysław Jagiełło), 폴란드 왕관을 쓰기 전까지의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

바로 그 숙부 케이스투트였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야기우워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됩니다.

만남도 좋지만… 음모도 함께

1377년 케이스투트는 여전히 건재했고, 국가의 상당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야기우워의 형제들 역시 각자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이들은 새 대공에게 곧바로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1377~1378년 겨울, 올기르트의 전처 소생인 안제이(Andrzej)는 이웃의 도움으로 야기우워를 축출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모스크바로 도피했습니다.

1년 뒤에는 드미트리 우시 올기르도비치(Demetriusz Olgierdowicz)도 모스크바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루테니아인들이 자신의 영지를 침공하자, 그는 그냥 그들의 편에 서 버린 것이죠. 동쪽에서 위기가 커져가는 가운데, 튜턴 기사단 역시 리투아니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젊은 왕좌의 주인이 발을 헛디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기우워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노선과 결별하면서도 숙부의 영토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유지하던 그는, 리투아니아인의 맹적(猛敵)과 직접 협상하기로 결심합니다. 『1795년까지의 리투아니아사』의 저자 중 한 명인 지그만타스 키아우파(Zigmantas Kiaupa)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379년 튜턴 기사단이 다시 빌뉴스를 위협하자, 야기우워는 새로운 정책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여름, 그는 동생 스키르가일라(Skirgaila)를 수도원 국가로 파견하여 양국 관계와 리투아니아의 세례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123쪽)

브와디스와프 야기우워(Władysław Jagiełło), 폴란드 왕관을 쓰기 전까지의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

처음에는 이 계획이 놀라운 성과를 낼 듯했습니다. 같은 해 가을, 야기우워와 케이스투트는 기사단과 트라카이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해 케이스투트 영토의 10년간 안보를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야기우워에게 이 정도의 보호장치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협정은 오히려 케이스투트의 입지를 강화할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대공은 신속히 자신만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1380년, 숙부 몰래 리보니아 기사단과 또 다른 밀약을 맺어 자신의 영지에 대한 보호를 약속받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무엇을 내놓았을까요? 바로 "수도원 국가가 트라카이 공국을 공격하더라도 케이스투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123쪽).

배신, 음모, 그리고 죽음

북쪽 측면이 확보되자 이제 동쪽의 위협을 처리할 차례였습니다. 1380년 야기우워는 모스크바에 맞서 타타르 금장군(金帳汗國)과 동맹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전역의 판도를 좌우할 그 전투에서 그는 어떤 활약을 폈을까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쿨리코보 평원에서 모스크바군은 타타르족을 격파했는데, 리투아니아 지원군은 기묘한 '우연' 때문에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교활한 대공이 연합군으로도 적을 꺾기 어렵다는 것을 예견하고, 핏줄의 피를 흘리느니 차라리 동맹을 희생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만약 야기우워가 정말 의도적으로 움직였다면, 그는 하마터면 권력을 잃을 뻔했습니다. 왕좌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케이스투트가 기사단과 맺은 밀약의 조건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제야 숙부는 왜 수도원 기사들이 몇 달마다 아무 처벌 없이 자신의 영토를 유린하는지 깨달았습니다.

노대공은 복수를 결심합니다. 어린 조카를 얕본 것은 물론, 완전히 속아 넘어갔으니까요! 재대결의 시간입니다. 1381년 가을, 야기우워와 그의 충실한 동맹 스키르가일라가 부재중인 틈을 타 케이스투트는 빌뉴스를 장악하고 공식적으로 조카를 폐위시켰습니다.

물론 그는 스스로 새 대공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때서야 젊고 야망 있는 야기우워의 입지가 얼마나 탄탄했는지 드러났습니다. 수도 백성들은 케이스투트의 무모한 정책—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사단과 사투를 벌이려는 극단적 노선—을 싫어했고, 야기우워의 편에 섰습니다.

브와디스와프 야기우워(Władysław Jagiełło), 폴란드 왕관을 쓰기 전까지의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

케이스투트에게 이 갈등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먼저 포로로 잡혔고, 불과 일주일 뒤에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화가 보이치에흐 게르손(Wojciech Gerson)은 케이스투트와 그의 아들 비톨트가 야기우워의 포로가 되는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키아우파의 설명에 따르면, "1382년 6월 상인 하눌(Hanul)이 이끄는 빌뉴스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야기우워의 군대에 합류했다." 훗날 폴란드 국왕이 될 야기우워는 대공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내전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히 기사단과 휴전을 갱신했고, 7월에는 케이스투트의 거점 트라카이를 점령했습니다.

8월, 두 대공의 군대가 결전을 위해 마주 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야기우워의 숙부는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아니면 단순히 이성을 되찾고, 기사단의 지원을 등에 업은 조카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케이스투트의 양심이 괴로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기우워는 배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케이스투트는 포로로 잡혔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야기우워 측이 주장하듯 자살이었을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케이스투트의 운명을 피한 것은 그의 아들 비톨트(Witold)였습니다. 그는 요행히 요새에서 탈출해 튜턴 기사단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야기우워는 곧 기사단과의 휴전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새로운 동맹을 찾을 때가 된 것이죠. 바로 그때 크라쿠프에서 온 사절단이 빌뉴스에 나타나, 피아스트 왕조의 피가 흐르는 어느 헝가리 공주와의 혼담을 넌지시 내비꼈습니다. 폴란드 왕관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실이 그렇게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처:

  • Zigmantas Kiaupa, "Lithuania during the reign of Gedyminowicz to be baptized", in: Zigmantas Kiaupa, Jūratė Kiaupienė, Albinas Kuncevičius, History of Lithuania from the earliest times to 1795, Polish Scientific Publishers PWN,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