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인간의 말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소리를 냈다. 뒤틀린 짐승 같은 얼굴, 짧게 자른 머리, 텅 빈 눈." — 1930년대, 공포에 떨며 이렇게 적은 이는 말콤 머거리지였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이 영국 기자가 말하는 '짐승'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 웅크려 앉아 있었고, 역에서 수군거렸다. 갑자기 야생 원숭이 떼처럼 나타났다가 흩어져 사라지곤 했다."
머거리지는 맨체스터 가디언에서 일했지만, 무엇보다 볼셰비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 열정을 좇아 '소련 낙원'으로 이주했지만, 곧 깨닫게 된다. 모스크바도, 옛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소련 전체가 결코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위에서 묘사된 존재들, 즉 러시아의 거리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고아였고, 피난민이었고, 노숙자였다.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야생화된 아이들이었다. 대부분 3세에서 7세 사이였으며, 그들에게 사회주의 행복의 땅은 지상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추산에 따르면 그 수는 무려 600만 명을 넘었다.
데르진스키의 골칫거리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아동 방임이라는 거대한 재앙의 문제가 '유일하게 올바른 당' 지도부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모도, 집도, 안전감도 빼앗긴 아이들은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설령 그것이 겨울마다 난방 없는 지하실을 전전하는 삶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비밀경찰의 수장, 펠릭스 데르진스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상황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아이러니했다. '피의 펠릭스'라 불린 그의 활동야말로 무보호 아동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주요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전쟁, 혼란스러운 경제 개혁, 식량 부족, 그리고 무자비한 적색 테러로 인해 구 제국의 수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부모가 총탄에 쓰러지거나 굶어 죽거나 루뱐카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면, 그 죽음을 자행한 이들은 남겨진 고아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들 대부분은 거리로 내몰렸다.
1922년부터 1923년 사이 교육인민위원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와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무보호 아동의 수를 파악하려 했지만, 600만 명이라는 추정치 앞에서 조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규모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냉혹한 현실에서 배운 아이들은 조사관이 찾아온다는 소식만 들으면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보호 아동 문제를 맡게 된 펠릭스 데르진스키. 사진은 레닌의 관을 운반하는 모습이다.
데르진스키 역시 이 아이들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부하 한 명을 국가 남부로 파견했고, 그 충성스러운 체키스트는 아동 방임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실비아 프로워프가 저술한 '피의 펠릭스' 전기에 소개된 보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최근 들어 무보호 아동의 수가 재앙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무리를 이루어 따뜻하고 굶주림이 없을 것이라 믿는 남쪽 어딘가로 향한다. 도중에 서로 합류해 하나의 이동 집단을 이룬다. […] 이 아동의 물결은 날로 커지고 있으며,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작은 노숙아들의 상황은 극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수준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데르진스키의 특사가 직접 방문한 시설에서는 여섯에서 여덟 명의 아이가 침대 하나에 누워 잠을 잤다. 옷도, 약도 없었고, 겨울에 다리를 감쌀 넝마조차 없었다. 아이들은 맨발로 걸어 동상에 걸렸고, 통조림으로 연명하며 굶주림으로 인한 부종에 시달렸다.
굶주림, 병리, 그리고 기다림
당국이 택한 해결책은 문제를 힘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악명 높은 체키스트들보다 더 적임자가 어디 있겠는가? 체키스트들은 작은 무보호 아동들을 문자 그대로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온갖 틈새에 몸을 숨길 수 있었고, 평범한 사람이 상상도 못할 장소에 숨어버렸다. 게다가 어떤 아이들은 몇 살에 이미 어린 깡패가 되어 있어 체키스트들은 언제나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어린 깡패들이 큰 무리를 이룬다면, 모스크바의 어두운 골목을 홀로 수색하는 체키스트 한 명이 안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녀들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른을 죽이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아살해는 살인이 아닌가? 프로워프가 인용한 추정치에 따르면 열두 살 무렵의 무보호 소녀 80% 이상이 이미 한 번 이상 임신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노숙아이고 아버지는 대부분 알 수 없는 갓난아이의 생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고아원? 낯선 집 문간에 버려져 누군가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것? 아니면 쓰레기통? 어느 선택지도 밝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 역시 자기 삶을 꾸리기에도 벅차서 버려진 아이의 책임을 질 여유가 없었다. 남은 것은 고아원뿐이었는데,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외국 언론을 향해 강하게 부인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죽음의 공간'에 불과했다.

무보호 아동들의 환경은 철저히 병리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강도질을 하고, 훔치고, 사람을 폭행했으며, 매춘에 종사하기도 했다. 실비아 프로워프의 표현을 빌리면, "소아매춘 업소가 비 온 뒤 버섯처럼 우후죽순 생겨났다"고 한다.
무보호 아동 무리는 온갖 질병의 온상이었다. 옴, 결핵, 이, 그리고 각종 성병이 만연했다. 게다가 어린아이조차 술, 담배, 약물에 중독되어 갔다.
성인과 아동 사이의 압도적인 힘의 격차 때문에 그들에게 유일한 생존 전략은 더 큰 무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폭력과 성폭력의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부모가 굴라그에 갇혀 있거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이상, 작은 '성가신 존재들'의 운명을 큰소리로 호소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많은 아이들이 무자비한 살인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소련 교육학의 붉은 별
이 작은 불행한 아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닿지 않을 듯싶던 그때, 안톤 세묘노비치 마카렌코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주도로 러시아 곳곳에 무보호 아동을 위한 수용 시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코뮌'은 모스크바 근교의 볼셰보에 조직되었다. 펠릭스 데르진스키 본인도 볼셰보를 여러 차례 찾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꼬마들은 내 가장 좋은 친구다. 나는 그들 곁에서 휴식을 얻는다."
보다시피 '붉은 처형인'은 음흉한 체키스트들 사이에서보다 완전히 타락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어쨌든 소련 곳곳에는 데르진스키의 이름을 딴 수용 시설과 청소년 센터가 수없이 많이 세워졌다.

선전 포스터 속 모습. 사진은 아동 수용소에서 수확 작업을 하는 막심 고리키다.
무보호 아동 시설에서 경험을 쌓은 마카렌코는 소련은 물론 세계 교육학계의 스타로 성장했다. 빈첸티 오콘의 폴란드 교육학 사전은 물론 스페인과 독일의 교육학 문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독특한 사회주의 교육 체계를 개발한 인물이었다.
수용 시설에 머무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완전히 재활시킬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적어도 그는 이들에게 권위에 대한 복종을 몸에 새겨 넣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굳게 믿었던 그는 어린 깡패를 '소련인'으로 키워냈다.
모범 시설로 불린 데르진스키 코뮌(방황 청소년 수용소)이나 고리키 콜로니(소년범 수용소)의 학생들은 권위에 순종하고 체제에 길들여졌으며, 어린 시절 도덕적 억제력을 잃은 채 자랐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야말로 NKVD가 찾던 이상적인 인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