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유대인 한 명당 500마르크를 지불한 나라? 티소 신부 치하 슬로바키아와 홀로코스트의 진실

독일에게 '비용'까지 지불한 유일한 공범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국가들이 히틀러에 협력하며 자국 유대인 시민들의 학살에 손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가스실로 보내지는 유대인 한 명당 독일에 돈까지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던 나라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로 요제프 티소(Jozef Tiso) 신부가 통치하던 슬로바키아였습니다.

전간기 슬로바키아에는 약 9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1938년 가을까지 이들은 크게 불만을 느낄 일이 없었습니다. 프라하 정부는 유대인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다른 시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도록 관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에 자치권이 부여되고, 이어 슬로바키아 독립이 선언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

슬로바키아 인민당(루다키) 출신으로 티소 신부가 이끄는 새 정권은 반유대주의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최근 출간된 안제이 크라브치크(Andrzej Krawczyk)의 저서에서 강조하듯이, 반유대인 결정들은 티소 정권 초기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그 계기는 1938년 11월 빈 중재 결정의 집행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슬로바키아는 남부와 동부의 광대한 영토를 헝가리에 할양해야 했습니다. 루다키 당은 이를 수천 명의 유대인을 제거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크라브치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티소와 그의 동료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존속 마지막 순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 영구 거주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신속히 재정착시킬 구상을 세웠습니다.

현지 당국에는 해당 대상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헝가리에 넘겨진 지역으로 추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핵심은 국경이 폐쇄되기 전에 그들이 본래 거주지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티소의 관점에서 이 작전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불과 십수 시간 만에 7천500명이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슬로바키아 유대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전례 없는 약탈

이후 몇 달 동안 반유대주의 정책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1939년 3월 슬로바키아 독립 선언과 거의 동시에 유대인 재산에 대한 대규모 '아리안화(Aryanization)'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약국이 몰수되었고, 이어 슬로바키아인들은 유대인 기업, 부동산, 농경지를 차례로 강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져 정통파 유대인들에게는 악기를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1941년 8월, 당국은 유대계 시민들이 모은 저축금까지 노렸습니다. 『슬로바키아, 신부 대통령』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 은행 예금과 저축 계좌에서 예치액의 50%가 징수되어, 새로 설립된 '유대인 이민 지원 기금'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 역사가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 금액은 당시 화폐로 3억5천만 크라운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 후 유대인들은 월평균 생활비를 초과하는 모든 돈을 특별 계좌에 납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모든 유대인 재산에 20%의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납부를 위해 이미 징수된 금액의 20%가 자동적으로 압류되어 추가로 2억8천100만 크라운이 걷혔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나타났습니다. 약 6만5천 명 이상이 약 44억 크라운 상당의 생계 수단을 박탈당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 결과 유대인 공동체의 70% 이상이 빈곤에 빠졌습니다.

역사상 가장 엄격한 반유대인 법률

물론 박해는 유대인의 재산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슬로바키아 당국은 그들의 시민적 자유 또한 체계적으로 제한했습니다. 1940년 여름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한 디터 비슬리체니(Dieter Wisliceny) 무장친위대 대위, 즉 아돌프 아이히만의 협력자가 이를 도왔습니다. 그의 등장으로 반유대인 활동은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1941년 9월 9일, 유대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포고령이 채택되었습니다. 안제이 크라브치크가 그의 저작에서 강조하듯, 이른바 '유대인 법전(Jewish Code)'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포괄적이고 엄격한 반유대인 입법이었다. 그것은 독일의 전례, 즉 뉘른베르크법보다 훨씬 가혹했으며 적용 범위도 더 넓었다.

그해 가을, 유대인들은 옷에 노란색 다윗의 별과 특별한 완장을 착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게토 설치 구상도 등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몇 달 전 선포된 슬로바키아의 국가사회주의 시대 개막과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그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국가의 완전한 '재건'이었습니다.

'유대인 없는 도시' 브라티슬라바

이미 1941년 1월, 슬로바키아 총리 보이테흐 투카(Vojtech Tuka)는 유대인 추방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이 구상은 슬로바키아 민족을 '타락'시킨 대가로 유대인이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은 요제프 티소 대통령의 명백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 신부 대통령』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941년 하반기, 반유대인 정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는 더 이상 재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공공생활 참여의 제한과 가장 기본적인 이동의 자유 제한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당국은 브라티슬라바를 '유대인 없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국내 강제 이주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수천 명을 국가 동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같은 해 10월 켕트시른(Kętrzyn)에서 열린 슬로바키아 지도측 정치인들과 아돌프 히틀러의 회담 중 변경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보이테흐 투카가 하인리히 힘러 SS 수장과 처음으로 슬로바키아 유대인들을 독일 점령하 폴란드로 추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이 논의가 슬로바키아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한 명당 500마르크

12월 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현지 유대인을 제3제국 영토로 추방할 수 있게 하는 독일 대사와의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두 달 후, 베를린은 브라티슬라바에 독일 공장에서 일할 추가 노동력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2만 명의 '비생산적인' 유대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후 몇 주 동안 사업의 물류에 관한 협상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브라티슬라바 정부는 총독부로 보내지는 유대인 한 명당 독일에 500마르크를 지불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른바 '정착 비용'(국경을 넘는 순간 유대인들은 자동으로 시민권을 잃음)이었습니다. 즉, 슬로바키아인들이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지불할 용의가 있던 금액인 셈입니다.

오늘날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어느 쪽이 추방을 제안했는지, 그리고 티소 대통령을 필두로 한 슬로바키아인들이 추방된 사람들이 살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령 티소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안제이 크라브치크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동부 전선의 슬로바키아 군인(군목 포함)의 보고를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량 처형과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총독부나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추방된 유대인들이 끔찍한 운명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 잔혹하게 대우받을 것이며 그들 사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슬로바키아의 홀로코스트

그러나 성직자였던 그에게는 그런 사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수송열차는 1942년 3월 25일 자정 직전 타트라 산맥 근처의 포프라트(Poprad)를 떠났습니다. 999명의 여성들이 탑승했으며,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1000번부터 1999번까지의 번호를 부여받았고, 이것이 비르케나우(Brzezinka) 수용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1942년 10월까지 지속된 '다비드 작전'에서 총 57차례의 수송을 통해 57,792명의 슬로바키아 유대인이 독일 점령하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이 중 거의 7천 명이 10세 미만의 아동으로,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추방을 피한 사람은 추정치에 따라 1만여 명에서 3만5천 명 사이로 다양합니다.

형식적으로 추방 중단에 관한 결정이 내려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44년 가을까지 슬로바키아에서 절멸 수용소로 향하는 새로운 수송은 없었습니다. 상황은 슬로바키아 국민봉기가 발발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아이히만의 직접 명령을 받은 브루너(Brunner) 무장친위대 대위가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는 슬로바키아인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대규모 유대인 색출 작전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1만4천 명이 추가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2년 전 살해된 동포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결국 요제프 티소 통치 기간 동안 슬로바키아 유대인의 80%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제3제국에 협력한 모든 국가 중 가장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 Andrzej Krawczyk, 『Slovakia, the president's priest (Jozef Tiso 1887-1947)』, SIW Znak, 2015
  • Lucy Dawidowicz, 『The War Against the Jews, 1933-1945』, Bantam, 1986
  • Martin Lacko, 『A two-armed cross in the shadow of a swastika: Slovak Republic 1939-1945』, Oficyna Wydawnicza El-Press, 2012
  • Timothy Snyder, 『Black Earth: The Holocaust as a Warning』, SIW Znak,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