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히믈러마저 속였다: 나치가 열광한 '고트족 독수리 브로치' 위조 사건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찾은 선물에 만족하지 못하셨다면, 언젠가 하인리히 히믈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의 역사에 관한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자, 뻔뻔하게 역사를 조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조력자들은 심지어 고대 유물까지 위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치 독일이 마침내 몰락의 길에 접어들자, 히믈러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독수리 모양의 작은 브로치 하나가 슈타른베르크 호반의 베르크 성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상자에 넣어 성의 공원 땅속에 묻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컬렉션에서도 이 유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 직후 미군 공병들이 공원을 수색했고, 그중 한 명이 이 뜻밖의 발견물을 우연히 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대로 가로챈 듯합니다. 유물의 행적이 갑자기 끊겨 버렸으니까요.

노스탤지어를 담은 보석

왜 이 작은 물건이 히믈러에게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독수리 형태의 이 브로치는 5세기 유물로 간주되며 게르만계 고트족의 것으로 여겨졌고, 나치는 독수리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유물은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고하려는 수요에 완벽하게 부합했습니다. 독수리 문장을 단 게르만 부족들이 대이동 시대에 유럽 전역(그리고 그 이상의 지역)을 누비던 시기를 이야기할 근거를 제공해 주었으니까요.

히믈러마저 속였다: 나치가 열광한  고트족 독수리 브로치  위조 사건

하인리히 히믈러는 고풍스러운 장식품들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 우아한 장식품이 고트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위조품이었습니다.

『재에서 피어난 빛: 4~5세기 유럽의 민족 대이동』의 저자인 고고학자 마그달레나 마친스카(Magdalena Mączyńska)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대이동 시대의 위조 황금 브로치와 버클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등장했지만, 어느 것도 '모라바산' 브로치처럼 큰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토록 유명해지지는 못했다."

브로치 발견 소식은 1937년 나치 잡지 『게르마넨-에르베(Germanen-Erbe)』를 통해 뮌헨의 미술사학자 프레데릭 아담 반 셸테마(Frederic Adam van Scheltema)에 의해 공개되었습니다. 이 브로치는 북부 모라바의 클림코비체(당시 명칭은 쾨니히스베르크) 마을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고, 고트족 유물로 기술되었습니다. 반 셸테마는 중개인 역할을 맡아 이 유물을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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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트족 독수리. 뉘른베르크 박물관 소장의 500년경 피불라(브로치). (사진: Pirkheimer, CC ASA 3.0 라이선스)

이 브로치는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196g에 달했습니다. 독수리의 눈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몸통에는 알만딘 석류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형태와 제작 기법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출토된 대이동 시대 브로치들과 흡사했습니다.

무엇이 의심을 불러일았나?

『게르마넨-에르베』에 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발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고트족 브로치가 어떻게 모라바 북부까지 도달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브로치 뒷면의 신비한 덩어리는 오래된 녹이 아니라, 알자스에서 나온 또 다른 위조품의 유사층과 동일한 성분이었습니다. 게다가 클림코비체에서는 브로치가 발견되었다는 발굴 조사에 대한 소문 자체가 없었습니다.

의심은 커져갔지만, 분위기가 모든 것을 해결했습니다. 당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진품이어야 했습니다! 나치가 선사 시대 민족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 말입니다…

1941년의 또 다른 글에서 아담 반 셸테마는 브로치의 진위성을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선사유물관리국도 그의 견해를 따랐습니다. 1942년, 관료들은 학자들에게 이 사건의 짐을 덜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물의 진위는 틀림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모든 논쟁은 강제로 종결되었습니다.

훌륭한 위조품은 포트폴리오의 기본!

이 사건이 밝혀지려면 먼저 전쟁이 끝나야 했습니다. 위조 사실은 우연히 드러났습니다. 1949년, 루이트폴트 피르츨(Luitpold Pirzl)이라는 뮌헨의 금세공사가 유물보호국에 신청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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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으로 그려진 고트족 전사들. 19세기 삽화.

그는 자신의 금속 유물을 돌려받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높은 기량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과 처남이 제작한 금세공품 사진들을 제출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은 "양식적 모방품", 즉 보석처럼 보이는 평범한 소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방품들 중에는… 클림코비체의 브로치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위조품은 많았다

피르츨은 게르만 예술 유물의 모방품도 다수 제작했습니다. 이는 전쟁 전에 이미 사기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는 미술품상 헤르베르트 폰 데어 마르비츠(Herbert von der Marwitz)의 의뢰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마르비츠는 이 위조품들을 박물관 기관에 판매했습니다. 모라바 브로치를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판매할 때 셸테마를 중개인으로 활용한 사람도 바로 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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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과 로마인의 전투. 서기 3세기 부조. (퍼블릭 도메인)

피르츨의 또 다른 위조품은 헝가리 북부 시라크(Szirák) 마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로, 황금 브로치, 목걸이, 여러 개의 반지, 그리고 353년의 콘스탄티우스 2세 진짜 동전 한 닢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대규모로 활동하던 마르비츠는 다른 금세공사들도 고용했지만, 그들의 신원은 끝내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종사하는 학문

마르비츠가 다른 환경에서도 똑같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 나치 독일에는 '게르만의 위대함'이라는 신화에 부합하는 발견에 대한 엄청난 수요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상징과 정치적 의례를 뒷받침할 고대적 근거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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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역사적 유사 사실을 억지로 접목시키려 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히믈러는 아넨에르베(Ahnenerbe), 즉 역사·고고학·인류학 연구를 통해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학술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이 조직은 예술품, 도서관 자료, 고고학 유물을 약탈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광기 속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은 미리 정해진 비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무덤 너머에서 공격하는 위조범

이 이야기는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마르비츠의 범죄 행위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림코비체 브로치에 대한 첫 번째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그는 이탈리아로 도피했지만, 그곳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뮌헨 아파트에서는 아직 판매하지 못한 수많은 위조품이 발견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면밀한 조사 끝에 이들의 진품 가능성은 배제되었습니다. 1940년 재판에서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히믈러마저 속였다: 나치가 열광한  고트족 독수리 브로치  위조 사건

위 사진은 나치 위조품을 다룬 두 권의 책입니다. 이 글 역시 이 책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 사건에는 최근에 또 한 번의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2001년 4월, 한 다이버가 뮌헨 근교 키임제 호수 바닥에서 신화 속 인물들이 새겨진 황금 솥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바이에른 주립 고고학 박물관은 이 물건의 가치를 약 10만 달러로 평가하고 경매에 부쳤습니다. 그러나 거래가 성사되기 전에 과학자들이 위조품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릇에 새겨진 신화적 장면들은 나치의 영웅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의심의 그림자가 마르비츠에게 드리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