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독일보다 앞서 있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만든 강제 수용소

'인도주의 전쟁'이라 불릴 예정이었던 이 전쟁은 곧 거대한 실험장으로 변모했습니다. 훗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활용된 각종 수단들이 이곳에서 시험되었는데, 독일이 같은 발상을 하기 한참 전에 영국이 이미 만들어 놓았던 강제 수용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나폴레옹 시대 이후 영국 제국이 치른 가장 피비린내 나고 막대한 비용이 든 전쟁으로 평가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정착민 후손인 보어인과의 충돌은 양측의 고집과 탐욕만 없었다면 어쩌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1차 보어전쟁에서 굴욕을 당한 영국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886년에는 독립 공화국인 트란스발과 오라니아에서 막대한 다이아몬드와 금광맥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보다 앞서 있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만든 강제 수용소

오늘날 영국이 보어전쟁 중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런던은 금광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요구했고, 보어인들이 이에 응할 리 없었습니다. 결국 1899년 10월 11일,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합니다. 어느 쪽도 이 전쟁이 얼마나 처참해질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얀 장갑 위의 학살

보어인의 억압에서 아프리카 흑인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영국 제국군은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트란스발과 오라니아로 진격했습니다. 그들의 원정은 방화로 일관되었고, 이 때문에 영국의 한 풍자작가는 새로운 훈장인 '횃불 훈장'을 신설하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한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라는 거의 완전히 유린당했습니다. 수 마일을 걸어도, 아니 몇 주를 걸어도 생명의 흔적이나 경작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위에는 불탄 농장과 황무지뿐입니다."

독일보다 앞서 있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만든 강제 수용소

강제 수용소에 갇힌 보어인 여성과 아이들

그러나 최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1900년 보어인들이 게릴라전에 돌입하면서 승리의 저울질이 그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런던은 현지 주민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두어 처리하기로 결정합니다. 수용소라는 '발명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이 이미 쿠바에서 사용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영제국은 이를 한층 더 '완성'해냈습니다. 과연 이 아프리카의 절멸 수용소는 어떤 조건이었을까요? 안드레아 피처는 저서 『끝나지 않는 밤: 강제 수용소의 역사』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햇볕에 그을린 초원 위, 낮은 언덕 기슭에는 울퉁불퉁하게 늘어선 원형 천막들이 서 있었고, 수용소 끝에는 시신 안치용 천막과 양철 지붕의 병원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피난처조차 부족해지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마차나 철도 화차에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
물도 비누도 없었고 홍역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할 때까지 천막에 방치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보어인들이 수감된 수용소의 실태였습니다.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작전을 대규모로 벌인 탓에 영국군은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자기 땅에서 난민이 된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별도의 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무료 식량과 숙소를 후하게 제공받는다는 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요. 실제로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 알프레드 밀너의 좌우명이 관리자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흑인만 희생시키면 게임은 쉬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을 수용소에 가두었고, 수천 명씩 죽였다"

훗날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영국은 흑인 아프리카인을 돕겠다는 명분 뒤에서 보어인들과 함께 원주민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인종 차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안드레아 피처는 『끝나지 않는 밤』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들은 분쟁 기간 내내 방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모두 11만 5천 7백 명이 넘는 흑인 아프리카인이 영국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양철 병원 막사도 없이, 벌거벗고 잠드는 난민들에게 옷가지와 요도 챙겨주지 못한 채, 모두에게 먹일 식량조차 바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보어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수용소에서 천막이 지급된 반면, '흑인' 수용소에 강제 수감된 사람들은 넝마, 나무 막대, 양철판, 담요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무료 배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그런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한 수용소에서는 주민들이 질병으로 죽은 소의 사체 외에 먹을 것이 없기도 했습니다.

만연한 기아, 도랑 변소, 갈수록 심해지는 과밀 수용은 이윽고 전염병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피처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난민들은 이질, 발진티푸스, 수두, 홍역, 폐렴에 시달렸습니다. (...) 많은 수용소에서 병원 간호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높은 영유아 사망률의 책임은 오히려 어머니들에게 돌려졌습니다. "원주민들은 아이가 쓸모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아이를 돌보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논리였습니다.

피로 적는 대가의 계산서

런던 정부는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지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과 인도주의 단체 대표들은 남아프리카의 위기를 거듭 지적했습니다.

독일보다 앞서 있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만든 강제 수용소

제2차 보어전쟁은 20세기의 다음 비극들, 즉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헤레로족 반란 진압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하원에서 로이드 조지는 이렇게 규탄했습니다. "이 수용소에 '난민 캠프'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입니다. 이건 어떤 난민 캠프도 아닙니다. 이것은 전장에서의 군사 작전 결과로 군이 설립한 강제 수용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으로도 수용소의 실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아 피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초원에 평화가 올 때까지 총 66개의 수용소가 설립되었고, 11만 5천 명이 넘는 흑인 아프리카인이 수감되었습니다. 이 중 1만 4천 명 이상이 생존하지 못했는데, 수용소를 거친 사람들의 약 12%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네덜란드인 후손들을 위한 수용소 역시 피로 적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피처가 『끝나지 않는 밤』에서 인용한 역사가 피터 워윅의 추산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2년 5월 마지막 날 이루어진 보어인들의 항복 때까지(...) 2만 7천 명이 넘는 수감된 보어인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양측 전장에서 전사한 숫자의 두 배에 달하는 것'으로, 인구의 약 10%에 해당합니다. 사망자의 거의 80%가 아이들이었습니다."

제2차 보어전쟁은 20세기의 다음 비극들, 즉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홀로코스트처럼 잘 알려진 비극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의 헤레로족 반란 잔혹 진압처럼 잊혀진 비극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강제 수용소의 짐승 같은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