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면에서 탁월했던 인물, 헤르만 룬드보리
헤르만 룬드보리(Herman Lundborg)는 여러 면에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의 연구 성과는 임상 유전학 분야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시점부터 그는 소위 '인종 위생(race hygiene)'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의 주장은 기름진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자라났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당한 수만 명의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룬드보리는 "국가의 가장 큰 재산은 국민, 즉 건강하고 우수한 유전 물질이라는 사실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의 평생에 걸친 학문 경력(그는 의학을 전공한 뒤 정신의학·신경학과 인종생물학 분야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1915년 웁살라 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을 인종 순수성 문제에 바쳤습니다. 그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본질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인종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민족, 예컨대 집시나 흑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좋은 환경을 통해 질을 개선할 수 없다. 문명 사회에서 최하층에 떨어진 계층, 즉 통용되는 규범을 습관적으로 어기는 자들, 부랑자, 백치, 범재들 역시 마찬가지로 질을 끌어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스웨덴 사회를 위한 나름의 '십계명'
퇴화의 재앙으로부터 스웨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그는 자신만의 '십계명' 버전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 안에는 말과 글로 인종 문화에 관한 지식을 널리 알리고, 알코올 중독, 결핵, 성병 같은 중대한 사회적 질병을 (가급적 불임 시술을 통해) 퇴치할 것, 그리고 '사회적 늪'을 이루는 퇴화된 개인들을 제거할 것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헤르만 룬드보리는 스웨덴에 강제 불임 시술을 도입했다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교수는 당연히 그에 걸맞은 '강력한' 과학적 근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는 블레킹에 지역 출신 한 가문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비크토리아 미하우키에비치는 저서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스웨덴 내셔널리즘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수십 장의 도표에 한때 지위 높던 가문이 퇴화의 길로 치닫게 된 조건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동성애, 나태함, 우둔함, 정신 질환이 그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2,232명을 조사한 결과 일반적인 경향이 드러났는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였던 반면, 혼혈에 해당하는 검은 머리와 까만 눈동자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종류의 퇴화가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 자체만으로는 그토록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수는 연구 결론을 스웨덴 인구 전체에 그대로 적용해 버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1914년, 국내에 '중간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총 28만 명에 달한다고 상세히 계산해냈습니다. 정신질환자 약 1만 8천 명, '백치' 1만 4천 명, '준백치'(imbecile) 2만 명 이상, '간질 환자' 7천 명, 그리고 수만 명의 알코올 중독자, 부랑자, 범죄자, 매춘부 등 기타 '반사회적 요소'가 포함된 수치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겨우 55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숫자는 상당한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덕분에 룬드보리의 후속 구상들은 정치권의 우파와 좌파 양쪽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었습니다.
사랑은 (인종적으로) 눈이 멀다
흥미롭게도 스웨덴 혈통의 순수성을 그토록 가슴에 품었던 그였지만, 정작 자신이 세운 규칙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선택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라플란드에서 연구하던 중 그의 눈에 마리아 이삭손이라는 검은 머리의 여성이 들어왔고, 그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그녀는 라플란드 혈통이 섞인 동발트 인종에 속했습니다(즉, 그의 기준으로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기 시작했고(공식적으로 그녀는 룬드보리의 청소 담당자였지만, 교수에게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아내가 별도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혼혈 아들 알란마저 낳았습니다. 룬드보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서로 다른 두 인종이 혼합되면 대개 특징들이 어울리지 않는 비조화적인 개체가 태어난다. 그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개인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기괴한 성질을 지닌다. 이런 사람들이 방탕과 범죄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헤르만 룬드보리는 힘러 본인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웨덴 두개골'에 대한 헤르만 룬드보리의 사랑은 훨씬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1921년, 그는 세계 최초로 공공 자금 지원을 받는 국립 인종생물학 연구소(State Institute of Race Biology)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이 기관의 핵심 목표는 인종 문제에 대한 방치가 서양 문명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명제를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속 전문가들은 '열등한' 인종이 '우수한' 인종보다 더 빠르게 번식한다는 사실을 '입증'해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강제 불임법 도입을 비롯한 여러 방안을 제안했고, 성공했습니다. 스웨덴 의회는 1934년 5월 18일 해당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
악마와의 공조
그보다 앞선 1932년 1월, 룬드보리는 완전히 다른 진영으로부터 자신의 급진적 사상에 대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의 뜻밖의 — 그러나 반가운 — 편은 다름 아닌 SS 수장 하인리히 힘러였습니다. 그는 서한에서 "유대인은 흑인, 히타이트, 몽골 및 유럽의 영향이 뒤섞인 혼합체로서 북유럽 인종(Nordic race)보다 훨씬 열위에 있다"고 쓰며, 교수를 "유럽 전역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이자 인종 의식을 갖춘 인사" 중 한 명으로 꼽았습니다.
이후 독일과 스웨덴 간의 협력은 한층 활기를 띠었습니다. 힘러의 추종자들은 스웨덴 과학자들이 개발한 '인종' 연구 방법론을 남김없이 활용했습니다. 반면 스웨덴 쪽은 나치의 행보를 매혹된 눈으로 지켜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1933년 독일에서 불임 수술이 몇 건 시행되었는가(남성과 여성)? 1934년에는? 1935년에는?"
정작 스웨덴은 이 분야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도입된 입법 변화는 40년 넘게 시행되었습니다. 1975년 법이 마침내 폐지될 때까지 약 6만 3천 명이 생식 능력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럼 룬드보리 자신은 어찌 되었을까요? 곧 그에 대한(그의 사상이 아니라 그 개인에 대한) 지지가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35년, 나치 반대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연구소의 성격을 인종 문제가 아닌 유전 질환을 다루는 연구 기관으로 바꾸고자 했던 군나르 달베리가 인종생물학 연구소(훗날 의료유전학 연구소로 개명) 소장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인간 두개골 대량 소장품과 두상 석고본, 그리고 약 10만 명의 스웨덴인에 대한 상세한 인종 기록이라는 형태의 전임자의 유산은 창고로 보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란의 교수까지 잊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뉴욕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인종 순수성을 다루는 학술지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그는 1943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강제 불임법이라는 형태의 그의 유산은 안타깝게도 훨씬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출처
이 글은 비크토리아 미하우키에비치의 충격적인 리포트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스웨덴 내셔널리즘에 관하여』(포즈난 출판사 간행)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