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레닌의 가장 큰 범죄: 스탈린보다 먼저 시작된 소련의 붉은 공포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정치적 탄압을 1937년, 즉 스탈린의 통치 시기와 연결 지어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민들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볼셰비키가 1917년 10월 25~26일(그레고리력 11월 6~7일) 밤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1918년에는 체제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의심되는(!) 인사들을 수감하기 위한 강제 수용소 설립을 직접 주도했습니다.

왜 레닌은 그토록 잔혹했는가

레닌은 오랫동안 군주제 전복과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차르 정권과의 투쟁에 일평생을 바친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배반한 자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조국을 배반하는 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1917년 3월 2일(15일)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할 당시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스위스에 망명 중이었고, 권력 장악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귀국은 쉽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으로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그의 귀국 여정을 도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레닌은 러시아의 패전을 주장했고, 그것이 국내 사회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독일의 도움이었고, 그 대가로 레닌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베를린과 단독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제국의 전환이 악화되고 독일 국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레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레닌의 가장 큰 범죄: 스탈린보다 먼저 시작된 소련의 붉은 공포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볼셰비키 지도자의 요청에 따라 베를린은 그와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그리고 최측근 30명에게 치외법권 지위가 부여된 특별 열차를 제공했습니다. 이른바 '봉인 열차'는 출입국 시 여권 검사 없이 무정차 운행했고, 밤에만 정차했으며 낯선 이들의 객차 출입은 철저히 차단되었습니다. 이 이름 그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또한 독일 외교관들은 레닌이 스웨덴을 경유하도록 주선했고, 그곳에서 핀란드를 거쳐 마침내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1917년 4월 16일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임을 선언했습니다. 독일은 자신들이 보낸 요원의 활동에 만족했으며, 당시 관계자의 보고는 이를 생생히 증언합니다. "레닌의 러시아 입국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정확히 움직이고 있다." 아울러 베를린은 국내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임시정부의 신뢰를 실추시키기 위한 레닌과 동료들의 전복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덕분에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권력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의 시작

임시정부 전복 당시부터 새 지배층의 잔혹함은 드러났습니다. 임시정부 각부처가 자리한 겨울궁전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은 이 건물을 방어하던 여성 대대 소녀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유린당한 뒤 잔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물론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러시아에서, 특히 비프롤레타리아 계층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 지배층은 구질서의 엘리트들을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체포 사유는 기이하기 짝이 없어, 피체포자의 아파트 방 개수가 가구원 수보다 많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레닌의 가장 큰 범죄: 스탈린보다 먼저 시작된 소련의 붉은 공포

체카 간부진(왼쪽부터): 얄콥스 페테르스, 요제프 운슐리히트, 아브람 벨렌키, 펠릭스 제르진스키,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1921년

새 지배층은 통치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 승인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치는 강제로 밀어붙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1917년 12월 7일 레닌은 체카(반혁명·사보타주 퇴치를 위한 전러시아 비상위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이 조직을 "당의 검이자 방패"라고 규정하고, 그 핵심 임무는 "누구든 상관없이 러시아 전역에서 반혁명이나 사보타주와 관련된 모든 시도와 행동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체카는 법 밖에서 활동하며 레닌에게 직속으로 예속되었고, 수장으로는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폴란드 출신 볼셰비키는 곧바로 재판 없이 현장에서 혁명의 적을 즉결 처형할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1918년 2월 레닌은 그러한 권한을 공식 부여했습니다.

굴라그의 탄생

레닌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면서도 노동 능력이 있는 자는 의무적으로 육체노동에 배치한다"고 결정되었습니다. 노동 수용소는 각 주(州) 소재 도시마다 설립되어 최소 300명의 수감자를 수용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노동 수용소가 바로 역사에 '굴라그'(국가 수용소 관리 총국)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레닌의 가장 큰 범죄: 스탈린보다 먼저 시작된 소련의 붉은 공포

굴라그로 끌려간 남녀는 모두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사진은 발트해와 백해를 잇는 운하 건설 현장의 소련 수용소 수용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에도 러시아인들의 봉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8년 6월, 펜자현에서 발생한 소요 소식을 접한 레닌은 다음과 같은 전문을 하달했습니다.

"소요는 자비 없이 분쇄하라. 쿨라크, 흡혈귀, 부르주아지 등 100명을 공개 처형하라. 처형 명단을 공표하라. 처형당한 자들의 가족에게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라. 100베르스타(약 107km) 이내의 사람들이 이 처형을 알고 몸서리치며 두려워하고 전율하게 하라. 이 임무를 수행할 매우 강경한 인물을 물색하라. 완료 후 보고하라."

같은 해 8월, 혁명의 지도자는 "혐의가 있는(!)" 자들을 수감할 강제 수용소 설립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수용소의 존재는 8월 30일 레닌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9월 5일 채택된 '붉은 공포 포고령'에 의해 공식화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문서는 개별 테러에서 대량 테러로의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볼셰비키의 새로운 전략은 제르진스키의 부관 얄콥스 페테르스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다시 고개를 들려는 어떠한 시도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모든 행동이 퇴색될 만큼 극심한 테러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레닌의 가장 큰 범죄: 스탈린보다 먼저 시작된 소련의 붉은 공포

'붉은 공포'를 도입한 장본인, 블라디미르 레닌

포고령이 공표된 다음 날, 소비에트는 전직 차르 정부 각료 십여 명을 공개 처형했습니다. 단 하룻밤 사이 페트로그라드에서 512명, 모스크바에서 600명, 크론슈타트에서 400명이 총살되었습니다. 또한 페트로그라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수감자 수십 명에 대한 사형 선고가 집행되었습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하루 동안 거리에서 붙잡힌 46명이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소비에트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처형이 자행되었습니다. 더욱이 런던 외무부에 보내진 영국 외교관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수치조차 축소된 것입니다. 러시아 역사학자 세르게이 볼코프 교수에 따르면,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약 200만 명이 볼셰비키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및 참고 자료

본 글은 저자가 2020년 '크시엥지 믈린(Księży Młyn)' 출판사에서 간행한 저서 『소비에트 국가의 비밀(Sekrety Krajów Rad)』을 위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