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참사, 방사선이 남긴 상처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약 500만 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그중 근 60만 명은 어린이였습니다. 방사선 노출로 인한 사망자는 최대 6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핵에너지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 해도 이 참사가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발전소를 둘러싼 상황은 마치 병에서 풀려나 끔찍한 재앙을 퍼뜨리기 시작한 지니에 자주 비유되곤 했습니다.
끄지 못했던 불
폭발은 실제로 체르노빌 시내가 아니라 프리피야티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발전소에서, 4월 25일 밤 26일 새벽으로 넘어가는 오전 1시 24분에 일어났습니다. 폭발로 4호 원자로가 파괴되었고, 높이 1km에 달하는 붉은빛과 노란빛을 띤 방사성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프리피야티 상공을 지나던 구름은 오염되었고, 이후 바람에 실려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사고 직후 몇 분 만에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물을 뿌려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당시 참사의 목격자이자 참여자 중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이 기묘한 불길은 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장교들의 노력이 실패하자 몇몇은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문제는 화재의 성격과 위험성을 아무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보호 조치도 없이 지붕에 올랐습니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그곳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나 높아, 소방관들은 한 시간 만에 인체에 안전한 선량의 50배에 해당하는 방사선을 쬐었습니다. 이미 새벽 2시경부터 그들은 구토와 코피, 실신 등 방사능 질환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방관들은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소련 유일의 방사능 질환 치료 기관인 모스크바 제6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약 50명이 극심한 고통 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골수가 손상되면서 시신은 스스로 미라화되었고, 피부가 통째로 벗겨져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평범했던 그날의 아침
프리피야티 주민들은 사고와 그로 인한 위험에 대해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1986년 봄은 유난히 따뜻했습니다. 1986년 4월 26일의 영상 기록에는 반팔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이 유모차를 밀고 다니고, 어린아이들이 모래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침에는 아이들이 늘 그렇듯 학교와 유치원으로 등교했습니다. 수많은 평범한 날들과 이 날을 구분한 것은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경찰관들이 배회했다는 점뿐이었습니다.
한편 군인들은 방사선 수치를 측정했고, 그 수치가 급격히 치솟는 것을 보며 경악했습니다. 4월 26일 저녁, 방사선 수치는 정상치의 60만 배를 넘어섰습니다! 이에 모스크바 당국은 프리피야티 주민 전원의 대피를 결정하고 특별히 준비된 버스로 사람들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주민들은 4월 27일 정오 공식 방송을 통해서야 대피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집을 비워야 한다고 통보받았고, 신분증과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출발은 오후 2시로 예정되었고, 1,000대가 넘는 버스가 동원되어 4만 3천 명이 탑승했습니다. 차량 행렬은 수 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이후 발전소 주변 30km 구역의 주민들도 추가로 대피했습니다.
BBC 다큐멘터리 '체르노빌의 전투(The Battle of Chernobyl)' 제작진에 따르면, 4호기 폭발 후 하루 이상 오염된 도시에 머물렀다는 사실 자체가 프리피야티 주민들의 골수와 혈액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암 발병으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도 오염 지역 주민과 그 후손들의 건강 상태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4월 27일 정오 공식 발표를 통해서야 대피 소식을 알게 되었고, 3일 동안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당국은 주민들에게 건강과 생명에 대한 위험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위험에 처한 것은 임산부였습니다. 태아의 갑상선이 방사성 물질을 흡수하면 태아의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30km 구역 내 임산부를 인공유산 대상으로 지정하라는 비밀 지시가 하달되었습니다.
첫 아이를 임신 중이던 이리나 미티나(Irina Mitina)는 바로 이 경험을 겪은 사람입니다. 1986년 4월 말 빈니차 지역 친척 집에 머물게 된 그녀는 즉시 산부인과 클리닉을 찾아 자신의 상황을 의사에게 알렸습니다. 의사는 임신 상태가 좋지 않다고 진단하고 수술실로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리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창문으로 클리닉을 탈출해(건물은 단층이었습니다) 친구 집에 숨었습니다. 몇 달 후 그녀는 남자 아기를 낳았지만, 아이는 경도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과연 이것이 1986년 4월 프리피야티에 머물렀던 어머니 때문이었을까요?
참사 수습의 대가
주민들이 대피한 뒤 프리피야티에는 군인과 각 분야 전문가들만 남았습니다. 당국은 발전소 참사 수습을 위해 이들을 소집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헬리콥터 조종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들이 도시로 파견되었습니다. 군의 임무는 여전히 4호기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고 개구부로 방사성 연기를 내뿜던 4호 원자로의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종사들이 원자로 상공에 기체를 멈춰 세우면 헬리콥터에 탑승한 군인들이 모래주머니를 던졌습니다. 한 번의 비행만으로 정상치의 9배에 달하는 방사선량을 받았음에도, 군인들은 하루 최대 6번의 비행을 감행했습니다. 누군가 피를 토하기 시작하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리고... 다시 비행 임무로 복귀했습니다.

주민 대피 후 프리피야티에는 참사 수습을 위해 소집된 군인과 전문가들만 남았습니다.
사고 직후 몇 주 동안은 더 강력한 2차 폭발의 위험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소련 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 폭발이 일어난다면 "유럽 전역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원자로 내부에 냉각 장치를 설치해야 했고, 그러려면 길이 150m의 새로운 터널이 필요했습니다. 1986년 5월 14일, 툴라와 돈바스에서 1만 명의 광부가 프리피야티로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교대로 3시간씩 밤낮없이 작업했습니다. 뉴스 영상에는 특별한 보호장구 없이 더위에 상의를 벗은 채 작업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방독면이 지급되기는 했지만 습기에 금방 젖어버려 작업자들은 결국 벗어버렸습니다.
수습 작업의 다음 단계는 4호기 위에 석관(사르코파구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지붕에서는 무선 조종 장비가 작동했지만, 방사선의 영향으로 기계들은 고장 나고 못쓰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시점에는 20~30세의 예비군 병사 6,000명이 삽으로 4호기 지붕에서 흑연 파편을 긁어모았습니다. 방사선 수치가 너무 높아 인간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90초였습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중 20%는 4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에서는 폭발 직후 방사능 질환으로 사망한 단 몇십 명만이 원전 폭발의 희생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