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크렘린궁을 피에 굶주린 기업에 비유한다면? 언뜻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우스운 비유도 아니다. 스탈린의 곁에서는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극히 어려웠다. 게다가 그 위험은 실로 컸는데, 걸리는 것은 직장만이 아니라…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여덟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니콜라이 예조프

약 100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는, 본보기가 되는 시체였다. 성실함과 헌신, 배우려는 의지, 그리고 동료들을 물어뜯는 소행 덕분에 그는 한낱 노동자에서 소련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실력자로 올라섰다. 평범한 당 활동가에서 시작해 특수목적대대 병사, 당 위원회 간부, 농민 반군 진압 담당자, 내무인민위원부(NKVD)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회 간부장까지 거쳤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그 사람이 있었다가, 이제는 없다. 처형 이후 예조프는 공식 사진에서조차 모습을 지워졌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1935년 그는 상관으로부터 특별 임무를 받았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죽음을 구실 삼아 구볼셰비키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NKVD의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이 자리를 무엇보다 좋아했다. 수감자들을 직접 고문했으며, 약 7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숙청' 역시 그가 설계한 작품이었다.

그는 전임자 겐리흐 야고다와의 거래로 숙청을 시작했다. NKVD의 '폴란드 작전'을 기획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곧 그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륙 수상 운송 인민위원으로 좌천되었고, 결국 얼마 전까지 자신의 부하였던 라브렌티 베리야의 주도 아래 고문과 조작된 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1940년 아무런 공개 없이 세상을 떠났다. 스탈린과 함께 찍힌 유명한 사진에서 사라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닌 사후 볼셰비키 당 정점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이 '동격 중의 제1인자' 자리에 오르도록 도왔다. 스탈린의 새로운 전기를 쓴 역사가 올레크 흘레브니우크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지노비예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된다. 미래의 독재자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야망을 지닌 그는 정치국원 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사실상 볼셰비키 러시아의 정부 역할을 하던 과두 집단, 비공식 '일곱 명(세메르카)'에서도 밀려났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재판정에 선 지노비예프(출처: 퍼블릭 도메인).

스탈린이 절대 권력자가 되자, 그는 자신에게 권력을 안겨준 구볼셰비키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지노비예프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숙청의 최초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936년 처형되었다.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레닌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지노비예프처럼, 말년의 레닌이 당에 스탈린을 경계하라고 경고할 때 일리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의 최고 권력 장악에 힘을 보태다가, 지노비예프와 똑같이 빠르게 모든 직책을 내놓았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1920년대의 레프 카메네프(출처: 퍼블릭 도메인).

1935년, 스탈린의 개인적 지휘 아래 예조프는 음모 혐의로 카메네프의 가족들과 지지자들을 체포했다. 이는 스탈린의 옛 동지들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을 향한 서곡이었다. 다음 해 카메네프는 첫 번째 모스크바 재판에 기소되어 총살되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스탈린의 모든 측근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1923년부터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그는 권력 다툼에서 스탈린을 지지했다. 이후 그는 수장에게 반대 입장에 서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는 성공적이었다. 각료직을 연이어 맡았고, 무엇보다 스탈린과 함께 국가를 통치하던 비공식 클리크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1954년 베를린에서 독일 공산주의자와 함께 있는 아나스타스 미코얀(사진: Heilig, Bundesarchiv 제공, 퍼블릭 도메인).

그럼에도 그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스탈린은 그를 수차례 공개적으로 질타했고, 실권과 관할 영역에서 밀어냈다. 올레크 흘레브니우크가 밝히듯, 많은 정황상 미코얀의 목숨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스탈린의 죽음이었다. 스탈린은 마침 측근들의 자리를 완전히 바꾸려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다.

니콜라이 부하린

프라우다 편집장으로서 스탈린과 긴밀히 협력했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코바(스탈린)의 부상하는 권력에 맞서려 시도했지만, 트로츠키와의 대결에서는 이미 '올바른' 편에 서 있었다. 수년간 그는 볼셰비키의 수석 이데올로그이자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 중 하나였으나, 1928년 실각한 뒤 정치국 자리마저 잃었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니콜라이 부하린(출처: 퍼블릭 도메인).

트로츠키를 격렬히 비난해 왔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우경 트로츠키주의 반소 블록'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938년 처형되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와 그녀의 가족 전체가 그 직후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아내는 고문을 당한 뒤 18년간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조지아 출신 오르조니키제는 스탈린의 혁명 청년 시절부터의 친구였다. 늦어도 1907년에는 이미 만났다. 그는 또한 스탈린을 첫 별명인 '코바'라고 불렀던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는 옛 우정이 남아 있었다. 스탈린은 오르조니키제가 조지아에서 행한 강경 정책의 후폭풍을 피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1925년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출처: 퍼블릭 도메인).

오르조니키제는 1930년 정치국에 들어갔고, 1932년부터는 중공업 인민위원(장관)을 맡았다. 그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고 코바에게 진심으로 솔직했다. 대공포가 커지자 그는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조치를 지연시켰고, 이후에는 부처 산하 부하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공포의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1937년 자살했다.

죽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스탈린은 잘못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그의 가까운 친구였다. 나는 그를 믿었고 그도 나를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와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 나는 자살할 것이다.

겐리흐 야고다

젊은 체키스트 시절 그는 차리친 내전 기간에 '활동'했다. 바로 그때 스탈린을 만났고, 그와 함께 혁명적 테러 전술을 처음으로 실행했다. 이후 코바의 후원 아래 보안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부국장으로서 그는 굴라그의 주요 설계자이자 벨로모르 운하 건설의 책임자였으며, 동시에 그 건설 과정에서 사망한 30만 명의 목숨을 거둔 집행자이기도 했다. 1934년부터는 OGPU 수장, 이후 NKVD 수장이 되었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1930년의 겐리흐 야고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그는 대숙청을 추진하는 데 충분히 열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어 빠르게 야심 찬 예조프로 교체되었다. 바로 예조프가(물론 스탈린의 동의 아래) 최근까지 자신의 상사였던 야고다에게 고문과 살인 혐의를 씌워 세 번째 모스크바 재판에 회부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혁명, 내전,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장군. 흐루쇼프 시절의 선전은 그를 '볼셰비키 나폴레옹'이라 불렀다. 이 뛰어난 차르 군 출신이자 볼셰비키 장교는 혁명군의 승리를 이끈 인물이었다. 바로 그가 혁명군을 지휘해 비스와 강까지 진격켰고,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의 학살로 이끌었다. 그는 전쟁 기술 발전의 위대한 선견지명자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뜨거운 의자, 붉은 차르의 궁정에서 자리를 잃는 것은 얼마나 쉬웠을까

미하일 투하쳅스키(출처: 퍼블릭 도메인).

이런 인물은 스탈린의 단독 통치 국가에서 생존하기에는 확실히 너무나 특별한 존재였다. 독일 정보기관이 투하쳅스키가 연루된 음모에 대한 '증거'를 심어놓았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틀린 말은 없다. 역사가 올레크 흘레브니우크가 인용한 문서들은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그 기소 과정을 감독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