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초의 헌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5·3 헌법(마요비차 헌법)은 격렬한 정치적 논쟁 속에서 탄생했으며, 그 채택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유럽 최초의 성문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오늘날 그 반대파들은 '민족 배반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안녕, 5월의 새벽이여, 우리 폴란드 땅을 비추어라. 온 폴란드에 이름난 노래로 너를 경축하리라." 이 가사는 대부분의 폴란드인에게 익숙한 5월 3일 마주레카의 한 구절입니다. 이 노래는 11월 봉기 당시에 작곡되었지만, 1791년 5·3 헌법 채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헌법은 개혁과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개혁은 훨씬 빠르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헌법 자체가 그 시대의 상징, 곧 조국을 구원하려는 의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제2차 분할 이후, 헌법은 세대를 거쳐 억압받아온 폴란드인들이 갈망해온 독립적이고 근대적인 국가라는 미완의 꿈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변화의 시대
폴란드 제1차 분할 이후 국내에서는 개혁 지지 세력이 점차 커져갔습니다. 사실 개혁의 필요성은 그보다 앞서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었습니다. 위고 코워유타이(Hugo Kołłątaj),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치(Stanisław Staszic), 그리고 저명한 극작가 율리안 우르신 님체비치(Julian Ursyn Niemcewicz) 등 폴란드 계몽주의 작가들은 귀족들의 음주, 나태, 사치를 비판하며 자유선거제와 리베룸 베토(liberum veto)의 폐지를 촉구했습니다.
기사학교(Knight's School) 학생들과 정치 활동에 참여한 젊은이들도 개혁 추진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카테리나 2세 여제가 통치하는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결정적 전환점이 마련된 것은 178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발발 이후였습니다. 여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원을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러시아 동맹을 승인할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의회는 1788년에 심의를 시작해 1792년까지 회기가 이어졌기에 역사상 '대의회(Great Sejm)' 혹은 '4년 의회'로 불립니다.
의장에는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Stanisław Małachowski)가 선출되었습니다. 대의회의 첫 결의안 중 하나는 영구 평의회(Rada Nieustająca)의 해산이었는데, 이 기구는 조롱 섞인 별칭인 '영구 배반 평의회'로도 불렸습니다. 영구 평의회는 명목상 국가 행정과 경제 발전을 책임지는 최고 기구였지만, 실제로는 국왕의 권력을 제약하는 등 폴란드인들의 증오를 샀습니다. 특히 평의회의 실질적 수장이 러시아 대사 오톤 마그누스 폰 슈타켈베르크(Otto Magnus von Stackelberg)였다는 점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대의회는 군대를 24,000명에서 100,000명으로 확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군비 확장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상 처음으로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재원으로 65,000명 규모의 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아울러 국왕 직할 도시의 도시민들이 귀족 칭호, 성직 서임 또는 장교 임관의 길을 열 수 있도록 하는 법률도 제정되었습니다.
국민적 합의
개혁파는 마샬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위고 코워유타이, 이그나치 포토츠키(Ignacy Potocki)를 중심으로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과의 합의를 모색했습니다.
새로운 국가 체제의 기초를 설계하는 임무는 이그나치 포토츠키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국왕의 강경한 반대파였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가깝지 않고 견해 차이가 있었음에도, 그는 새 헌법 제정에 국왕의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 합의 덕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 체제를 급진적으로 바꾸는 헌법 초안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1791년 5월 3일 의회 회기에서 국왕과 개혁파의 공동 입장이 발표되었습니다. 법안 통과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폴란드가 처한 절박한 상황, 그리고 분할 강국들이 다시 드리운 위협의 그림자를 의원들에게 생생히 일깨운 것이었습니다. 격론 끝에 마침내 의원들은 합의에 도달했고, '정부법(Ustawa Rządowa)'으로 알려진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럽 최초,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근대 성문헌법이었습니다. 왕실 성 앞에 모인 군중은 헌법 채택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1791년 의회 문서 축쇄본이 펼쳐진 모습. 5·3 헌법 페이지가 보입니다.
정부법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분할 구도를 폐지하고 하나의 단일 국가, 곧 폴란드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또한 삼권 분립이 도입되었고, 도시민의 권리가 확대되며 농민에 대한 보호 조치가 마련되어 그들의 처우가 장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무엇보다 리베룸 베토와 자유선거제가 폐지되어, 이후 왕위는 선거가 아닌 세습으로 계승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배반의 상징, 타르고비차
이러한 급진적 변화에 반대한 세력은 스타니스와프 슈치스니 포토츠키(Stanisław Szczęsny Potocki), 세베린 제부스키(Seweryn Rzewuski),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브라니츠키(Franciszek Ksawery Branicki)가 이끌었으며, 이들은 예카테리나 2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1792년, 이들은 타르고비차(Targowica)라는 마을에서 동맹, 곧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고 10만 러시아군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Józef Poniatowski)가 지휘하는 폴란드군은 지엘렝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더 큰 적군을 막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 배반의 상징'으로 규탄받는 타르고비차 진영이 권력을 장악하고 5·3 헌법의 조항들을 무효화했습니다. 귀족 특권, 리베룸 베토, 자유선거제가 되살아났습니다. 1793년,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폴란드군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제2차 폴란드 분할을 단행했습니다.

타르고비차 진영 인사들을 허수아비로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그림
이후 세대에 걸쳐 폴란드인들에게 5월 헌법은 자긍심과 자유, 애국심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분할 지배 시기에는 정부법 채택 기념일을 기념하는 것 자체가 엄중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18년 독립을 회복한 후에야 비로소 의회는 5월 3일을 국경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에는 공산 정부가 공개 집회를 금지하며 이 기념일을 다시금 억압했고, 그날마다 민병대(밀리차)와의 충돌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공식적인 기념 행사가 다시 허용된 것은 1981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