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없는 문화를 얕본 초기 유럽인들
초기 유럽인들은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를 깔보았습니다. 구슬이나 조개껍데기 같은 교환 수단은 무시당했고, 금속 화폐를 모른다는 점은 냉혹하게 이용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화폐 시스템이 항상 더 나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대륙 최초의 식민 개척자들이 이 사실을 몸소 확인하게 됩니다.
1620년, 신대륙에서 새 삶을 찾아 떠난 잉글랜드 청교도들, 이른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아메리카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식량 외에도 원주민과의 교역에 쓸 물건들을 챙겨 왔습니다. 저자 내서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은 저서 『메이플라워: 미국 탄생의 이야기(Mayflower: A Tale of America's Beginnings)』에서 "그들은 목걸이, 구슬 등 여러 물품을 들고 가 인디언들로부터 모피와 곡물을 교환해 받았다"고 적습니다.
물론 최초의 잉글랜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원주민들에게 좋은 대가가 된 다른 물품들도 많았습니다. 인디언들은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괭이와 솥 같은 철제 도구·그릇, 담요, 머스킷총, 그리고 물론 술과도 기꺼이 교환했습니다.
신대륙의 화폐, '왐펌'
필그림과 인디언 사이의 교역에 진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유럽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이 받아들인 화폐였습니다. 바로 이른바 왐펌(wampum), 즉 구슬을 꿰어 만든 허리띠입니다. 신네덜란드(New Netherland)에서 왐펌은 보편적인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네덜란드 상업 대리인 이작 드 라시에르(Isaack de Rasiere)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이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왐펌은 흰색과 보라색 구슬로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 역시 정교하게 엮인 인디언 구슬을 화폐처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늘 들어온 이야기처럼 만들기 쉽고 조악한 물건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필브릭은 『메이플라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왐펌은 고둥의 흰 껍데기와 아이슬란드산 조개 껍질의 푸른 부분으로 만든 원통형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었다. 보라색 구슬은 흰색 구슬보다 약 두 배의 가치를 지녔다. 구슬로 지불하려면 왐펌은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잉글랜드인들은 인디언들 못지않게 능숙하게 구슬이 제대로 잘리고, 모양이 다듬어지고, 닦이고, 구멍이 뚫리고, 꿰어졌는지 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위기의 시대, 구원이 된 구슬
구슬은 이후 식민 개척자들의 '지갑'에 영구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원주민에게서 사들인 땅값까지 구슬로 치렀습니다. 훗날 리호보스(Rehoboth) 마을이 된 지역은 1642년 열 암스(fathoms) 분량의 구슬로 매입되었는데, 와파노아그(Wampanoag) 족장 마사소이트(Massasoit)는 화폐 대신 코트 한 벌을 요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무렵의 거래는 아직 상당히 비공식적이었고, 오늘날 보면 충격적으로 낮아 보이는 가격들은 전적으로 당사자의 재량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구대륙에서 온 사람들 역시 '원시적인' 아메리카 화폐의 안정성과 가치를 인정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초반에 특히 수지가 맞지 않던 식민지는 여러 차례 차관에 의존했고, 활동 자금을 먼 본국에서 조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금줄이 갑자기 끊기면서 위기가 닥쳤습니다. 필브릭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640년대 위기 때 잉글랜드에서 차관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식민지는 왐펌을 법정 화폐(legal tender)로 사용함으로써 뉴잉글랜드의 재정난을 덜었다. 이때 인디언들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미국식 방식으로 장사할 기회를 열어 준 셈이다.
즉,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 역시 조개껍질 구슬을 주고받으며 거래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식민 개척자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문화가 그토록 자랑하는 화폐 덕분이 아니라, 바로 이 구슬 덕분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 Nathaniel Philbrick, 『Mayflower: A Tale of America's Beginnings』, Wydawnictwo Poznańskie,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