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불운한 걸작 '최후의 심판' 삼폭화, 바다 약탈부터 전쟁까지 이어진 기이한 여정

중세의 이 제단은 문화적 가치 때문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풍부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예술 작품은 거의 없다.

안젤로 디 야코포 타니가 피에솔레에 있는 산 바르톨로메오 성당을 위해 제단화를 후원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최후의 심판' 삼폭화에 어떤 격동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브루주의 화가 한스 멤링의 이 작품은 모험 소설 주인공이라 해도 믿기 힘든 여정을 거쳤다.

불운한 걸작  최후의 심판  삼폭화, 바다 약탈부터 전쟁까지 이어진 기이한 여정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계속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소설 『최후의 심판』의 저자 미로스와프 부이코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 제단이 겪은 격동의 행방 사건을 직접 마주하게 된다. 대체 이 제단은 어떻게 그단스크의 성모마리아 성당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몇 번이나 원래 자리로 옮겨졌을까? 그리고 왜 오랜 세월 동안 완전히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전시되었던 것일까?

브루주의 비전가

한스 멤링은 중세와 르네상스가 교차하던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반사광과 눈부심을 활용해 관객에게 추가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네덜란드 회화 학파의 대표주자였다. 유명한 제단화 중앙부에 묘사된 대천사 미카엘의 매끈하게 반짝이는 갑옷 판에서 그런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안젤로 디 야코포 타니가 의뢰한 이 삼폭화는 1467년부터 1471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종말론적 주제는 당시 미술에서 가장 즐겨 다뤄진 소재 중 하나였지만, 멤링의 작품은 오늘날 이 장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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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후원자 안젤로 디 야코포 타니는 브루주에 있던 메디치 은행 이탈리아 지점의 책임자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제단은 피렌체 근교 피에솔레의 산 바르톨로메오 성당 내 산 미켈레 예배당을 장식해야 했다. 타니가 멤링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은 단순히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자신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이 제단이 새로운 직장인 런던으로 향하는 길에 재앙이 닥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과 함께 더 높은 존재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보험 같은 선물'이었다고 추측한다.

또한 제단 후원을 통해 라이벌인 토마소 포르티나리와의 갈등을 달래려는 의도였다는 가설도 있다. 완성된 작품은 바다를 통해 목적지로 배송되었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바다 위의 강탈

'최후의 심판' 삼폭화가 갈레온선 '성 마태오 호'를 타고 잉글랜드 해안으로 항해할 무렵, 바다에서는 잉글랜드-한자 동맹 전쟁이 이미 2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작품을 실은 배는 토마소 포르티나리가 임차한 배였다. 불운하게도 이 갈레온선은 파베우 베네케가 이끄는 카라벨선 '페터 폰 단치히 호' 선원들의 눈에 띄었다. 1473년 4월 27일, 훨씬 강력한 한자 동맹 함대가 '성 마태오 호'를 공격해 약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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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밝혀진 바로는, 잉글랜드로 향하던 배의 화물창에는 값진 물건들이 가득했다. 천, 캔버스, 가죽, 실크 장식품, 명반 등 포르티나리의 보물들이었다. 약탈자들은 한스 멤링의 제단화도 발견했고, 나머지 전리품과 함께 '페터 폰 단치히 호'의 그단스크 선주들에게 넘겼다. 선주들은 이를 다시 그단스크 성모마리아 성당에 헌납했다. 이 대담한 행위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직접 개입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제단은 1807년까지 그단스크에 남아 있었다.

전쟁 속의 운명

19세기가 시작되고 나폴레옹 전쟁이 찾아오면서, 프랑스 귀족이자 예술가·외교관·여행가였던 도미니크 비방 드농의 손에 의해 삼폭화는 전리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흥미롭게도 작품의 작가 신원은 잊혀진 채, 파리에서는 이 제단이 … 얀 반 에이크의 작품으로 전시되었다.

10년 후 삼폭화는 베를린으로 반환되었다.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는 이 독특한 '전리품'을 계속 보유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단스크 측 대표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단스크 측은 라파엘의 『시스티나 성모』와 신진 예술가들을 위한 장학금 3개를 조건으로 맞바꾸자는 제안조차 거절했다! 결국 제단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반 에이크 연구 전문가 하인리히 구스타프 호토의 연구 덕분에, 이 작품의 창작자가 반 에이크가 아니라 한스 멤링이라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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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불운한 제단의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 제3제국이 빼앗아간 전리품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이어 붉은 군대의 손에 넘어갔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1956년, '최후의 심판' 삼폭화는 바르샤바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소련이 확보한 미술품 전시회'의 일부가 되었고, 1958년에야 마침내 그단스크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성모마리아 성당(여기서는 복제품을 볼 수 있다)이 아니라 포메라니아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이는 1930년대 복음주의 성모마리아 교구가 이곳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작품은 그단스크 국립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감의 원천

이 글은 소니아 드라가 출판사에서 방금 출간된 미로스와프 부이코의 소설 『최후의 심판』에서 영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