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드라큘라 대 오스만 제국 — 왈라키아 공작은 어떻게 유럽을 지켜냈는가

흡혈귀 드라큘라를 다룬 책과 영화 속에서 왈라키아 공작은 탁월한 전사이자 자신의 영토를 끝까지 사수하는 무자비한 수호자로 그려집니다. 실제 역사 속 인물도 그러했을까요?

블라드 드라큘라가 다스린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을 가르는 국경지대라는 불운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는 메메드 2세 술탄이 이끄는 자신의 두 배에 달하는 대군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흉포하기로 악명 높던 이 공작은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드라큘라 대 오스만 제국 — 왈라키아 공작은 어떻게 유럽을 지켜냈는가

봉기(꽂아죽이기)로 이름을 얻은 블라드 임펠러는 어떻게 명성을 쌓았을까요? 드라큘라는 뛰어난 전략가였을까요? 정말로 그가 직접 전장에 나섰고, 병사들은 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 그가 메메드 2세 술탄 본인을 죽일 뻔한 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격동의 시대

모든 것은 술탄이 드라큘라에게 전통적인 공물인 청년 500명과 막대한 금화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해 투르크 행정 조직에 편입될 예정이었는데, 이러한 관행은 오스만 제국에서 꾸준히 시행되었습니다. 대재상 마흐무트 파샤 역시 원래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한편 왈라키아의 공작은 다뉴브 강 너머로 자신의 백성들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투르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왔고, 교황이 십자군 원정의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라큘라 대 오스만 제국 — 왈라키아 공작은 어떻게 유럽을 지켜냈는가

왈라키아 통치자의 반발에 불만을 품은 술탄은 그를 꾀로 붙잡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라큘라는 금과 사람으로 된 공물을 직접 바치기 위해 도시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임펠러는 술탄의 의도를 간파하고, 오히려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역으로 포획하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 후 그는 그들 모두를 티르고비슈테 궁전 아래에 창에 꽂아 늘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투르크에게 상당히 노골적인 경고처럼 보였지만, 드라큘라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마테이 카자쿠의 저서 『드라큘라』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라드의 복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작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누었고, 킬리야에서 주 강 근처의 라호바에 이르기까지 약 800킬로미터에 걸친 지역에서 파괴적인 습격을 감행했다.

초토화 작전

피에 굶주린 복수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사실 전술적 차원의 선택이었습니다. 드라큘라의 군대는 정면전에서 오스만 대군의 위력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 혼란을 일으키면 투르크군을 교란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블라드는 병력을 분산시켜 수많은 소규모 부대를 만들고, 적이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빠르게 타격하고 물러나는 전법을 구사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목적은 메메드 2세가 강 동쪽 마을들에 두고 있던 후방기지의 파괴였습니다. 그곳에는 제국에 복무하는 용병인 아킨지와 마르톨로스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강변 주민들은 투르크군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헝가리 국왕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작전을 총결산하며, 블라드는 집에 불타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23,883명을 죽였다고 계산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메메드 2세가 드라큘라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로 진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건방진 공작

메메드는 약 6만~8만 명의 병력과 다뉴브 강에서 항해하는 선박 40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드라큘라의 병력은 겨우 31,000명에 불과했고, 그중 6,000명은 몰도바의 슈테판 대공 군대와 동시에 공격받던 킬리야 방어에 파견해야 했습니다. 즉 블라드의 전력은 적의 절반, 아니 3분의 1 수준이었다는 뜻입니다.
1462년 6월 4일, 오스만 제국군은 비딘에 남아 있던 마지막 다리를 통해 다뉴브 강을 건넜습니다. 투르크군은 왈라키아 평원에 진입했습니다. 날씨도 좋지 않았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여름은 뙤약볕이 무자비하게 내리쬐어 무장 행군이 몹시 고단했다고 합니다.

드라큘라 대 오스만 제국 — 왈라키아 공작은 어떻게 유럽을 지켜냈는가

오늘날까지 잔혹한 인물의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사실 그는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투르크군은 알지 못했습니다… 무려 드라큘라 본인이 그들 사이에 잠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공작은 상인으로 변장하고, 뛰어난 언어와 풍습 지식을 살려 적진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진영의 배치 계획과 병사 수를 파악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낸 뒤, 그는 가장 용감한 기병 7천~1만 명을 소집하며 말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자는 나와 함께 오지 말고 여기 머물러라."
드라큘라는 해 진 후 세 시간을 기다렸다가 투르크 진영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손에는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요란하게 불면서, 블라드의 병사들은 최대한의 혼란과 손실을 안겨야 했습니다. 한편 공작 본인은 메메드 2세가 있으리라 믿은 사령부 텐트를 찾아 돌진했습니다. 그는 안으로 뛰어들어 오스만 지휘관들을 베어 죽였지만, 아마도 짙은 어둠 때문에 술탄이 아니라 마흐무트와 이삭 두 재상의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드라큘라는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병사들

드라큘라의 야간 습격 당시 투르크군은 당연히 그의 병사 몇 명을 생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문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블라드 임펠러의 은신처를 술탄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칼코코디올레스의 기록에 따르면, 드라큘라 휘하 병사 한 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다른 이들이 두려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 들었지만 […] 나는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결코 아무것도 밝히지 않겠다고 답했다."

한편 이반 3세의 대사였던 표도르 쿠리친은 야습에서 돌아온 뒤 드라큘라 진영에서 벌어진 장면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전투에서 함께 돌아온 자들을 [드라큘라는] 직접 심문했다. 앞이 찢긴 상처를 입었으면 영예로운 보상을 하고 기사로 삼았다. 등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등째로 창에 꽂으면서 말했다. '너는 사내가 아니라 여자다!'"

그 운명적인 밤 이후 술탄은 행군 시 더 자주 멈춰 섰고, 매번 진영을 목책으로 둘러쌌습니다. 마침내 그는 드라큘라의 본영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창에 꽂힌 사람들로 이루어진 숲을 발견했습니다. 블라드를 붙잡으려 했다가 붙잡힌 암살자들과 포로가 된 병사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칼코코디올레스의 기록(아마도 다소 과장되었겠지만)에 따르면 그 수는 약 2만 명에 달했습니다. 같은 저자는 또한 술탄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습니다:

"[…]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고, 자신의 권위와 백성을 그토록 비범하게 활용할 줄 아는 남자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수는 없다고."

메메드는 공성전을 포기하고 왈라키아를 헤매다가 끊임없이 드라큘라의 기병 습격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술탄의 군대가 거둔 성과라곤 가축 약 20만 마리를 약탈한 것뿐입니다. 결국 메메드는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드라큘라는 여전히 자신의 땅을 다스렸고, 그의 군대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에 술탄이 남길 길은 다뉴브 강을 되돌아가 정치적 다툼으로 판을 바꾸는 것뿐이었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몫으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