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1937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뻔했던 이비자 사건

휴양지로만 알려진 섬, 역사의 무대가 되다

이비자(Ibiza)라고 하면 대부분 황홀한 휴양 여행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지중해의 태양이 내리쬐는 섬은 역사 교과서에 전혀 다른 이름으로 기록될 뻔했다. 제3제국이 스페인 공화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게 만드는 사건의 발단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은 1937년, 실제보다 2년이나 앞당겨 시작되었을 것이다.

평범하게 시작된 작전

모든 것은 의외로 무해하게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29일, 스페인 정부 함대는 마드리드 정부에 무기와 물자를 실어 나르던 소련 선박을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기지를 떠났다. 작전의 진짜 목적을 적의 눈을 돌리기 위해, 당국은 이비자 항구에 양동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공습과 더불어 구축함 4척의 함포 사격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작은' 문제가 생겼다. 항구에는 독일 선박 3척이 정박해 있었던 것이다. 포켓 전함 '도이칠란트(Deutschland)', 어뢰정 '레오파르트(Leopard)', 그리고 보급선 s/s '넵툰(Neptun)'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기습

독일 승조원들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필 그날이 토요일이라 함장 팡거(Fanger) 중령이 오후 근무를 해제하면서 배 안 분위기는 한층 느슨해져 있었다. 함대 음악대가 연주를 펼치고, 선원들은 갑판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매점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관측 초병만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7시경 공화파 구축함들이 발견되면서 모든 것이 깨졌다. 함장은 즉시 10분 준비 태세를 선포했지만, 대공포 진지를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분 후, 이 방심은 뼈아픈 대가로 돌아왔다. 소련 조종사가 조종석에 앉은 SB-2 경폭격기 2대가 도착한 것이다. 대공 경보가 울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폭탄이 함선 위로 쏟아졌다. 두 대의 폭격기는 각각 4발씩 두 차례에 걸쳐 투하했다. 한 발은 갑판을 꿰뚫고 들어가 제116 프레임 부근 격간에서 폭발했고, 폭풍파는 제94~145 프레임 사이 해군 식당까지 밀려들었다.

두 번째 폭탄은 105mm 중포탑 천장을 뚫고 들어와 폭발했다. 화염 속에서 제121 프레임 근처 보트스웨인 창고가 열렸고, 그곳에 보관된 페인트와 용제 같은 인화성 물질이 불길을 더욱 키웠다.

설상가상으로 거의 같은 시각, 공화파 구축함들의 포탄도 항구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두 번째 일제 사격은 독일 함선들을 거의 명중할 뻔했다. 다행히 스페인 측은 자신들이 제3제국 국기를 단 선박을 향해 발포하고 있음을 깨닫고 즉시 사격을 중단한 뒤 본대로 철수했다.

참혽한 피해

한편 포켓 전함에서는 큰불이 번지고 있었다. '레오파르트' 동료들의 지원을 받은 '도이칠란트' 승조원들은 수십 분에 걸쳐서야 불을 잡았다. 피해 목록은 처참했다. 현장에서 22명이 즉사했고, 83명이 부상을 입었다. 화상을 입은 선원 열몇 명이 뒤이어 숨지면서, 그 운명적인 날의 최종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어났다.

지브롤터 총독의 허가 아래 희생자들은 현지 묘지에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날 '도이칠란트'에서 숨진 독일 군인은 스페인 내전 내내 파견된 '드로네(Drohne)' 기갑집단의 전체 손실보다 거의 4배나 많았다.

오폭격인가, 변명인가

이 논란 많은 '전과'는 G.K. 리빈스키(Livinsky)가 이끄는 부대의 몫이었다(종종 N.A. 오스트랴코프의 이름이 잘못 알려지기도 한다). 소련 조종사들은 이후 독일 함선을 민족주의파 국기를 단 순양함 '카나리아스(Canarias)'로 착각해 오폭격했다고 해명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공격은 함상 대공포의 사격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분노한 히틀러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벌어진 소식을 접한 히틀러는 격노했다. 다음 날인 5월 30일, 공화파가 해당 폭격기의 소속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베를린에서 비상 정부 회의를 소집했다. 무력 대표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회의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처음에 히틀러는 공화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제안했고, 이후에는 발렌시아 전체를 파괴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만약 제3제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분쟁에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개입했다면 유럽이 수년간 두려워해온 결과, 즉 분쟁의 확전과 대륙적, 아니 전 세계적 차원으로의 비화가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은 2년 일찍 터졌을 것이고, 주요 참전국은 무엇보다 독일과 소련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전개가 오히려 다른 나라들에게는 다행이었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상징적 보복, 알메리아 포격

결국 긴 시간의 숙의 끝에 상징적 보복이 결정되었다. 독일 함선들이 공화국의 항구 도시 하나를 포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비개입위원회가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부대의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때까지 독일 함선들이 스페인 연안의 해상 통제에서 철수한다는 성명도 발표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포켓 전함 '아드미랄 셰어(Admiral Scheer)'와 어뢰정 4척으로 구성된 독일 함대는 5월 31일 알메리아(Almería)를 포격했다. 주요 목표는 항구 자체였지만, 첫 일제 사격이 빗나가면서 주거 지역에 포탄이 떨어져 24명이 사망(민족주의파는 19명 사망 주장)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작전은 목숨을 걱정한 주민들의 대규모 이탈도 불러왔다.

사건의 에필로그

'도이칠란트' 사건의 마지막 장은 지브롤터에 잠든 독일 선원들의 유해 문제였다. 히틀러의 뜻에 따라 이들은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묘지로 옮겨져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현지 규정상 매장 후 1년이 지나야 이장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총독의 승인을 받은 뒤, '도이칠란트' 승조원들이 6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몰래 유해를 옮기는 작업을 벌였다. 5일 뒤 거행된 국장에는 히틀러를 비롯한 제3제국의 요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출처

기본 자료:

  1. Tomasz Nowakowski, Mariusz Skotnicki, Legion Condor. Hitler's Spanish War, Erica 2011.

추가 자료:

  1. Michael Alpert, La guerra civil española en el mar, Editorial Critica 1987.
  2. Antony Beevor, Fighting for Spain 1936–1939. The first clash of totalitarianisms, Mark 2009.
  3. David Porter, Kriegsmarine. The Essential Facts and Figures for the German Navy, Amber Books 2010.
  4. Robert H. Whealey, Hitler and Spain. The Nazi Role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