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루스벨트를 겨눈 총구: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가 세계사를 거의 바꿀 뻔했던 순간

1945년 4월 12일, 병든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려 12년 동안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아주 근소한 차이만 있었더라면, 그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1933년 2월 15일, 루스벨트는 문자 그대로 기적적으로 암살자의 총구에서 목숨을 건졌다.

1930년대 초반은 미국인들에게 혹독한 시기였다. 대공황은 국가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허버트 후버 행정부가 내놓은 극복 정책들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기에 '뉴딜(New Deal)'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루스벨트는 1932년 11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힘겹게 치른 선거전을 마친 당선자는 1933년 초,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폴란드 신문 '일루스트라노비 쿠리에르 코디엔니(Ilustrowany Kuryer Codzienny)'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요트 '노르마할(Nourmahal)'호를 타고 낚시 여행에 나섰다. 여행을 마친 뒤에는 행정부 구성을 완료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발 한 번 차이로 달라졌을 수도 있었던 역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1933년 2월 15일이 찾아왔다. 바로 이날 요트를 탄 루스벨트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이를 맞아 도시 당국은 명예로운 손님을 성대히 맞이하기로 했다. 루스벨트는 베이사이드 파크(Bayside Park)에서 연설을 하고, 자신을 위한 만찬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루스벨트를 겨눈 총구: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가 세계사를 거의 바꿀 뻔했던 순간

주세페 장가라. 1933년 2월 15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행사장에는 저명한 정치인과 실업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물론 새 대통령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플로리다 주민들의 인파도 공원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새 국가 원수에게 박수를 보낼 생각이 없는 남자가 숨어 있었다. 그의 계획은 완전히 달랐다. 바로 대통령 당선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이탈리아 출신 무정부주의자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였다. 그는 며칠 전 우연히 루스벨트의 방문 소식을 접했다. 그는 고민도 없이 현지 전당포에서 리볼버를 구입했고, 사건 당일 오후에는 당선자가 연설하는 오픈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려 애썼다.

키가 약 155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체구 탓에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고, 범인은 침착하게 표적에서 몇 미터 떨어진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가 차에서 내려 군중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 장가라는 재빨리 총에 손을 뻗어 다섯 발을 발사했다. 그러나 단 한 발도 루스벨트의 몸에 닿지 않았다! 당선자는 목숨을 건졌고, 그 공적은 토머스 아머(Thomas Armor)와 릴리언 크로스(Lillian Cross)에게 돌아간다.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무정부주의자의 팔을 붙잡아 밀쳤고, 그 덕분에 루스벨트는 확실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를 겨눈 총구: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가 세계사를 거의 바꿀 뻔했던 순간

부상을 입은 시카고 시장 안톤 체르마크. 대통령 당선자를 향해 발사된 총탄 하나에 맞았다.

대통령 암살인가, 아니면 시장 저격인가?

안타깝게도 흘러나온 총탄은 다섯 명을 부상 입혔고, 그중 두 명은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그중 한 명이 시카고 시장 안톤 체르마크(Anton Cermak)였다. 어린 시절 체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루스벨트의 오랜 친우이자, 시카고 마피아를 끝까지 굴복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조직 범죄와의 강경한 대결 노선 때문에 곧바로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암살의 진짜 표적은 대통령 당선자가 아니라 체르마크였으며, 모든 것을 배후에서 지휘한 자는 '바람의 도시' 시카고의 범죄 조직이라는 주장이었다.

연방수사국(FBI)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섰지만, 새로운 단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범인 스스로 아무런 배후 없이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강조했으며, 동기 역시 '대통령과 왕들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조금의 후회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사건 발생 불과 5일 만에 열린 재판에서 그에게 징역 80년(20년형 4번)을 선고했다. 그러나 장가라는 이 판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사형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창 속에서 남은 생을 보내느니 전기의자가 더 낫다고 여겼던 그는 물론 항소하지 않았고, 검찰 역시 판결에 만족했다.

루스벨트를 겨눈 총구: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가 세계사를 거의 바꿀 뻔했던 순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암살 미수 사건 직후 촬영된 주세페 장가라의 경찰 기록 사진.

상황은 1933년 3월 6일, 안톤 체르마크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급변했다. 재판이 신속하게 다시 열렸고, 이제 살인자가 된 암살자는 자신이 바라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20일, 그는 라이포드 주립교도소에서 전기의자로 처형되었다.

한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후 12년간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는 대공황에서 미국 경제를 이끌어 올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반면 우리에게 그는 스탈린을 향한 지나치게 유순한 외교 노선으로 주로 기억된다. 만약 1933년 2월 15일 그날, 총탄이 과녁에 명중했다면 미국과 폴란드의 운명은 어땠을까? 역사는 아슬아슬한 한순간의 차이로 쓰여지는 것이다.

출처

  • '일루스트라노비 쿠리에르 코디엔니(Ilustrowany Kuryer Codzienny)', 1933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암살 미수 사건 관련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