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사람을 잡아먹은 섬, 소련 '식인의 섬' 나진의 충격적인 실화

생존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의 심장과 폐, 간을 먹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되었고, 동시에 희생자이자 사냥꾼이었습니다. 문명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섬,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모든 이를 기다리는 죽음. 1930년대 소련이 시베리아 미개척지 개척을 추진한 결과는 어디로 향했을까요?

소련 '야생 동부'의 '대계획'

시베리아와 북부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지역을 개척하려는 계획의 입안자는 OGPU(합동 국가 정치국)의 수장 겐리히 야고다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완전히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정치 지도부가 수송과 물류 조직화에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추방은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베리아 깊숙한 곳으로 보내진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했습니다.

야고다는 150만 명이면 혹독한 자연을 개척하고 삼림을 벌목하며 스스로 마을과 도시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지도부 역시 무역과 자원 개발을 활성화하면 강제 이주에 드는 비용을 소련이 빠르게 회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1932년부터 소련 내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은 국가에 중요한 곡물 수출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요구하는 납품 기준을 높였습니다. 이는 농업 기계 수입 증가로 이어졌고, 산업화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수확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농민들은 곡물을 땅에 묻거나 숨기는 방법으로 국가에 낼 곡물을 최소화하려 했고, 집단농장 관계자들과 농민 간의 연대도 점차 커졌습니다. 당국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1932년 가을에는 OGPU 요원 수백 명을 마을로 파견해 '부주의한' 농민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들은 '반혁명 분자'로 규정되어 '노동 마을'로 추방되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은 섬, 소련  식인의 섬  나진의 충격적인 실화

겐리히 야고다

당은 도시로 피난 온 농민, 범죄자, 그리고 다른 민족 출신 난민(그 가족들까지 포함)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여권 발급이 거부되었습니다. 니콜라스 워스(Nicolas Werth)는 저서 『식인의 섬』에서 OGPU 장교의 말을 인용합니다.

(…) 이 모든 분자들을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잡아 추방하기 위해, 여권 사무소에서 특별히 지명된 경찰관들이 부서 감독관의 지휘 아래 건물 관리인과 경비원들이 보관하는 우편물을 검열하고, 계절 노동자용 막사, 수상한 분자들이 모이는 장소, 불법 취침소, 다락방과 지하실을 샅샅이 뒤졌으며, 역, 장터, 시장 등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검문을 실시해 하층 분자, 거지, 도둑을 그곳에서 몰아냈다.

체포와 강제 추방

1933년 4월 기준, 추방 계획에는 약 75만 명의 '반혁명 분자'가 8월까지, 그리고 9월부터는 추가로 25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OGPU 운수국장 이자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는 소위 '최적 수송'이라는 구상을 제시했습니다. 하루 4개 호송대에 각 1,800명씩(하루 7,200명, 월간 216,000명), 두 개는 시베리아로, 두 개는 카자흐스탄으로 보낸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종이 위의 계획이 현실과 거의 무관하게 받아들여지곤 했습니다. 작전은 1933년 5월 1일에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첫 수송은 이미 4월에 이루어졌습니다.

특별 정착지 지역국장 이반 돌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처음으로 당은 우리에게 이토록 큰 과업을 맡겼습니다. 혹독한 조건 속에서 단 두세 달의 여름 동안 백만 명을 정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 적은 자원과 빈약한 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과업이 당과 OGPU가 맡긴 것이기에 불평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

검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길거리 소탕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흔한 체포 사유는 여권 등 신분 서류의 부재였습니다. 체포 후 추방된 사람들 중 일부의 목록입니다.
- 블라디미르 노보이요프: "모스크바 출신, 콤프레소르 공장 운전수, 세 차례 우수 근로자로 선정됨 (…). 퇴근 후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가려던 중, 아내가 준비하는 사이 담배를 사러 잠시 거리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 N. V. 보이킨: "(…) 축구 경기를 보러 가던 중 거리에서 연행되었다. 여권을 챙기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 마슬로프: "당원으로 모스크바 가스 공장에 근무했다. 친구인 엔지니어와 처남에게 술 한잔을 청했다. 세 사람은 안주를 사러 거리로 나갔다가 식료품점 앞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붙잡혔다. 여권이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추방되었고, 엔지니어와 처남은 나진 섬에서 사망했다. 마슬로프만 살아남았다."

- 라함메치야노바: "12세 소녀, 러시아어를 하지 못한다. 모스크바를 경유하던 중이었다. 어머니가 빵을 사러 간 사이 역에 혼자 남겨졌고, 경찰은 부랑 혐의로 소녀를 체포해 나림으로 보냈다."

1933년 5월 초, 약 2만 명을 실은 열차가 톰스크로 향했습니다. 수송 조건은 끔찍했고, 대다수는 살아서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지쳐 죽어가는 동료들을 이용하려는 범죄자들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나진 섬과 '사람 몰이'

경비병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 모집 당시 본부가 그들을 보호해 주고 제복, 신발, 주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받은 것은 낡은 소총뿐이었고, 그렇게 타이가로 보내져 - 그들이 표현하듯이 - '사람들을 몰아 다니는' 일을 맡게 되었다.

톰스크에 도착한 후 당국은 사람들을 재편성하고, 가장 '하층화된' 이들로 판단되는 이들을 강을 통해 북쪽으로 더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약 5,000명의 예정 정착지는 나진과 프로레타르카 마을 사이에 위치한, 길이 3km 폭 500m의 섬이었습니다. 이들은 5월 18일 출발했습니다. 도착 후 먼저 여성 332명, 이어서 남성 4,556명이 바지선에서 내리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여정을 버티지 못한 27구의 시신이 그 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 목격자들은 추방자의 약 30%가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야위고 탈진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지휘관 체프코프는 밀가루 자루를 준비하라고 명령했고, 굶주린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자 경비병들은 발포해 다수의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밀가루 배분을 조직하려는 시도도, 점토 화덕을 지으려는 시도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전자의 경우 사람들은 더 많은 식량을 차지하려고 계속해서 서로 싸웠고, 후자의 경우 땅이 너무 단단히 얼어 있어 빵을 굽는 화덕을 건설할 수 없었습니다. 지휘부는 결국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떠나버렸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은 섬, 소련  식인의 섬  나진의 충격적인 실화

식인의 섬

수송 지휘관 콜루바예프의 증언입니다.

5월 20일 오후 2시, 지휘관 체프코프와 함께 나진 섬에 갔다. 인파가 어지럽게 들끓었고, 사람들이 밀가루 자루 주위에서 싸우고 몸싸움을 벌였으며,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백 구 또는 그 이상 (…). 추방자들이 시신을 먹기 시작했다는 말, 사람의 고기를 굽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섬은 끔찍하고, 섬뜩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대부분 힘이 다해 물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무리들이 형성되었고, 새로 합류하는 사람들은 '돼지'라고 불렸습니다. 음식이 없으면 결국 그렇게 전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을 피워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기에 산 채로, 날것으로 먹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증인들은 섬에서 나뭇가지에 걸린 사람의 살점이나, 땅에 떨어진 헝겊에 싸인 육편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타이사 초카리에바의 증언입니다.

섬에는 경비병이 있었다 (…),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그곳에 보내진 예쁜 소녀에게 마음을 두고 그녀를 보호했다. 어느 날 그가 자리를 비워야 했을 때, 친구에게 그녀를 맡겼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녀를 잡아 포플러 나무에 묶은 뒤, 가슴과 근육,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잘라냈다. 경비병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는 그녀를 구하려 했지만 그녀는 결국 실혈로 죽어갔다 (…).

나진 섬의 비극은 1980년대에야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공산당 장교이자 지역 일간지 통신원이었던 바실리 아르세니예비치 벨리치코가 남긴 기록과 그의 자체 조사가 없었다면, 이 끔찍한 진실은 아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8월 20일 기준으로 여러 차례 수송으로 섬에 보내진 거의 7,000명 가운데 약 2,000명만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벨리치코는 섬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편지를 작성해 스탈린에게 직접 보냈습니다. 덕분에 1933년 가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현지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주, 추방, 도시 숙청 정책 자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