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진 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빚은 대부분의 군주들에게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이에 빠르게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수많은 '왕관을 쓴 채무자' 중에서도 가장 병리적인 사례는 아마도 폴란드의 마지막 선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였습니다.
훗날 왕이 될 그는 젊은 시절 유럽 여행을 통해 금융 세계와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가족이 모든 경비를 넉넉히 보장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파리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차르토리스키 가문과의 인연 덕분에야 그는 겨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살롱에서의 화려한 활약과 수많은 로맨스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의 재정에는 부정적인 영향만 미쳤습니다. 더욱 큰 부담이 된 것은 폴란드의 새 국왕으로서 추진한 야심 찬, 주로 문화 분야의 정책이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자신의 수입이 터무니없는 꿈을 실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차피 언제든지 미래의 분할자들을 대표하는 외국 고위 인사들의 선물을 받으면 됐으니까요.

국왕은 화려함과 영광으로 자신을 둘러싸야 했습니다. 사진은 군사 열병식 장면입니다.
왕좌도 없고… 돈도 없는 왕
진짜 문제는 폴란드 제3차 분할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폴란드인들에게 세상이 무너져 내린 그 시기에, 폐위된 국왕이 걱정한 것은 침략자들이 자신의 채무를 대신 갚아줄지 여부였습니다! 그 금액은 무려 4천만 즈워티라는 천문학적인 수치에 달했습니다.

그 정도 돈이면 12만 명 규모의 군대를 1년 내내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한편 5월 3일 헌법 방어 전쟁 당시 러시아군과 타르고비차 연합군의 총 병력은 9만 8천 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빚 상환 약속이 국왕이 서면으로 자발적으로 폴란드 왕관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금액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혹은 우리가 어떻게 이웃의 계획을 망쳤는가』의 저자 얀 브로벨(Jan Wróbel)에 따르면, 포니아토프스키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으며, 전형적인 귀족 스타일의 파티는 폭식을 좋아하지 않아 지루해했다고 합니다. 도박 탓도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탕진한 주범은 가족이었습니다. 국왕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모험가들과 협박꾼들에게 지불하는 데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먼저 잘 속는 국왕에게서 귀중한 비밀을 얻어낸 뒤, 폭로를 빌미로 협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름다운 옷, 예술 작품, 각종 골동품에 대한 국왕의 집착이었습니다. 퇴위한 후에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관과 골동품 상점을 돌아다니며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과 작품들을 사 모았습니다. 여전히 바르샤바에서 실무를 보던 그의 재정 담당관들은 손만 비비며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퇴위 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몰락한 왕치고는 나쁘지 않은 처지였습니다(사진: A. Savin, CC BY-SA 3.0).
설상가상으로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구입한 희귀품을 귀족 친구들에게, 심지어 차르 파벨에게까지 기꺼이 선물했습니다. 폐위된 폴란드 국왕의 이러한 생활상이 비스와 강변의 여론에 알려지자 만인의 혐오를 샀습니다.
왕답게 사는 삶?
전 폴란드 국왕은 여전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매년 수백 두카트씩 지급했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리석 궁전을 유지하며 차르를 기리는 행사를 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의 의사, 뛰어난 이탈리아 치과의사, 그리고 유명한 요리사 폴 트레모(Paul Tremo)의 급여까지 지불했습니다. 마실 물은 브리스틀에서 직접 운송해 왔고, 빵은 바르샤바 밀가루로 구워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침략자들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빚 상환뿐만 아니라 연간 20만 두카트의 연금까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행이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해체되자 오스트리아는 채무 지급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고, 프로이센 역시 계속 늦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에게 우호적이었던 차르 파벨 덕분에 러시아만이 제대로 지급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돈이 얼마나 오래 갔을까요? 1795년 1월 포니아토프스키는 5만 두카트를 받았지만, 1년 내내 쓸 수 있어야 했던 돈은 불과 8월에 바닥나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국왕은 끝까지 누구도 자신의 급여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줄곧 한계선 위에서 살아온 전 국왕의 건강은, 끊임없는 채무 스트레스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 갔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은 굴욕적인 빚에 빠져 죽어갔습니다.
젊은 시절 "개인의 의무를 갚는 것은 모든 남성의 명예로운 행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정작 이 격언을 스스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1798년 2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잠재적인 상속인들에게는 얼마나 곤란한 일이었습니까. 전 군주는 적어도 가족에게 번거로움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빚의 일부는 결국 "고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의 기억을 파산의 수치에서 구하기 위해" 조카인 요제프 포니아토프스키 공작이 떠안아야 했습니다. 고인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것은 단지 123두카트와 55루블뿐이었습니다.
편집: 로만 시도르스키(Roman Sidorski) / 사진 편집: 로만 시도르스키(Roman Sidor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