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제프 피우수츠키(Józef Piłsudski) 서거의 또 다른 기념일입니다. 아마 인터넷 곳곳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 지도자의 죽음을 접하고 국민 애도를 선포했다'는 이야기가 다시 넘쳐날 것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베를린은 '총사령관'에게 어떻게 작별을 고하였을까요?
유제프 피우수츠키의 죽음은 폴란드 역사에서 한 시대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폴란드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대표들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원수(元帥)가 세상을 떠난 뒤 전 세계 언론은 예외 없이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나라에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를 추모하는 애도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독일의 '국민 애도'는 어떠했나?
폴란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것은 단연 베를린에서 치러진 추모 행사입니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통설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피우수츠키의 죽음을 접하고 5월 13일 독일 전역에 3일간의 국민 애도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이 이야기를 애정 어린 눈으로 회자하고 있으며, 슬라보미르 코프라(Sławomir Kopra)의 인기 저서에서도 이 주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조작된 정보입니다. 히틀러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주독 폴란드 대사 유제프 립스키가 베를린 성 야드비가 대성당 계단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피우수츠키 추모 미사 직전의 장면이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당시 폴란드 언론은 독일 총리가 국가원수의 죽음에 적용되는 애도 규정을 발령했다고 분명히 보도했습니다.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공식적으로 피우수츠키는 군무부 장관 겸 군 총감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가 폴란드에 대한 경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국민 애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애도의 실질적인 내용이란, 5월 13일과 18일(크라쿠프 장례식이 거행된 날) 정부 청사의 깃발을 깃대 중간에 내려 게양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독일은 다른 세계·유럽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에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조의를 표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똑같은 조치를 취했지만, 오늘날 이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으며, 세느 강변에서 열린 '국민 애도'에 대해 일일이 기록하는 이도 없습니다.
피우수츠키 사후 독일에는 국민 애도가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히틀러는 5월 13일과 18일에 국기를 깃대 중간에 내려 게양하라고 명령했을 뿐입니다. 사진은 제국 수상 관저에 게양된 조기의 모습입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그럼에도 히틀러가 다른 나치 요인들과 함께 성 야드비가 대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에 참석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행사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은 주독 미국 대사 윌리엄 E. 도드(William E. Dodd)의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5월 18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오늘 나는 옛 제국 성 근처의 가톨릭 대성당에서 크라쿠프에서 동시에 장례식이 거행되던 피우수츠키를 위한 추모 미사에 참석했다. 성당은 만원이었다. 히틀러는 제단 오른쪽의 명예석에 자리했고, 노이라트 외무장관, 괴벨스 선전장관, 그리고 국방군 장군들이 히틀러 뒤편 첫 번째 줄에 앉았다. 제단 바로 앞 의자에 앉은 히틀러의 독특한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비교적 따뜻한 날씨에 성당 안에서 흰 장갑을 낀 모습들을 보는 것은 우스운 광경이었다. 완전히 의례적인 행사였지만, 검(劍)에 관해서는 기독교 성당 안에서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 혐오감이 들었다."
성 야드비가 대성당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피우수츠키의 상징적 관(棺) 곁에 선 아돌프 히틀러(출처: 퍼블릭 도메인).
3일 뒤에는 국회 개회식에서도 피우수츠키에 대한 경의가 추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의장 괴링은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신사 여러분, 자리에서 일어나 며칠 전 이 세상을 떠난 분의 명복을 빌어 주십시오. 독일 민족은 폴란드 민족의 가장 위대한 원수의 무덤 앞에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독일인은 폴란드 민족이 입은 상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피우수츠키 원수는 어디에서든 평화를 위해 일어섰고, 폴란드와 독일의 상호 이해를 위해 힘쓴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슈프레 강변의 베를린에서는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도시들은 어땠을까요? 피우수츠키의 죽음과 관련된 세계 각지의 추모 행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 Henryk Cepnik, Józef Piłsudski. Creator of the independent Polish State, Institute of State and Creative Propaganda, Warsaw 1935.
- William E. Dodd, Ambassador's Journal 1933–1938, "PAX" Publishing Institute 1972.
- "Express Illustrated", 1935.
- "Illustrated Daily Kuryer",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