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1931년 중국에서 발생한 대홍수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자연재해였습니다. 이 재해로 약 370만~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를 입은 사람은 5,000만 명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군벌 할거 시대의 장강 유역
당시 중국은 오랜 세월 국가를 황폐화시킨 수많은 지역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유한 장강(양쯔강) 유역에는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습니다. 1923년 군벌 우페이푸(吳佩孚)는 후난성과 후베이성을 포함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심했고, 이듬해인 1924년 여름에는 유능한 장군 양센(楊森)이 다스리던 쓰촨성마저 그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2년 뒤인 1926년 봄, 장제스(蔣介石)의 군대가 세력을 키워가던 우페이푸를 막아섰습니다. 우페이푸는 군대와 함께 수도 충칭을 떠나 북쪽으로 진격했고, 권력은 총독들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불운하게도 그중 탕(唐)과 펑(彭) 두 사람이 양센에게 반기를 들었고, 짧은 전투 끝에 충칭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우페이푸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원에 유폐되었습니다. 총독들은 장제스와 항복 협정을 체결했으며, 양센은 주군을 위해 점령했던 완셴(현재의 완저우) 방면으로 장강을 따라 충성 부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우페이푸는 유폐된 직후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이 갈등으로 장강 유역은 크게 황폐해졌지만, 반란 진압은 장제스의 위상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높였습니다.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은 그를 중국 정세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완셴 사건의 또 다른 결과로 중국 내륙 하천에 주둔하는 서구 병력이 증강되었고, 새롭고 현대적이며 무장이 잘 갖춰진 함선들이 등장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정부는 장강으로 자국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단했던 세월
나라가 다시 궤도에 올라서는 듯했을 때,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이어진 가뭄이 심각한 식량 부족을 초래했습니다. 한편 1930년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여 산악 지역에 두꺼운 눈과 얼음층이 쌓였습니다. 1931년 초, 녹아내린 눈과 얼음이 장강을 따라 흘러내려 봄철 집중호우와 맞물리며 강 중류 지역까지 도달했습니다.

1931년 8월, 국제 적십자사의 도움을 기다리는 피해자들
장강 유역에는 원래 봄, 여름, 가을에 걸쳐 세 차례의 홍수기가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931년에는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연속적인 대홍수가 이어졌습니다. 6월에는 저지대 주민들이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7월 한 달 동안 연간 평균 2개를 넘지 않는 사이클론이 무려 9개나 이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같은 달 서구 열강이 건설한 4개 기상 관측소는 합계 600mm가 넘는 강수량을 기록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장강의 수위는 19세기 중반 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서구 열강 대표들은 무역 거점을 폐쇄하고 선박들을 상하이로 대피시켰습니다. 상류에서는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홍수파가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물결
홍수는 약 18만 제곱킬로미터를 잠갔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남한 전체 면적(약 10만㎢)의 1.8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당시 중국 정부는 2,500만 명이 홍수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피해자는 5,300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홍수는 막대한 주택과 농경지를 파괴했습니다. 장강 유역 밀과 벼 수확량의 약 15%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이전 가뭄의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많은 지역이 기근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무껍질, 잡초, 심지어 흙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을 팔았고, 또 어떤 이들은 식인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했습니다. 홍수의 장기적인 후유증은 전국을 휩쓴 질병이었습니다. 콜레라, 홍역, 말라리아, 이질이 연달아 유행하며 중국을 덮쳤습니다.
수백만의 희생자
홍수 첫 몇 주 만에 약 15만 명이 익사했고, 이후 몇 달 동안 수십만 명이 더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정부와 이후 공산당 연구자들은 사망자 수를 422,420명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장강 안전 관리와 인도적 지원에 참여했던 서구 정부 관리들은 사망자가 370만~400만 명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피해자 수는 5,3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인도적 지원이 모여들었지만,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미신 타파 운동의 일환으로 홍수 직전 우한의 용왕묘 철거를 명령했던 정부를 국민들은 재난의 책임자로 몰았습니다. 이 우연한 일치는 폭동으로 번졌고, 많은 현지인들은 이 참사를 우신(雨神)인 용왕의 노여움 때문이라 여겼습니다. 신생 정부에게는 심각한 시련이었습니다.
장제스는 쯔원 숭(송자문, 宋子文)의 주관 아래 국민 홍수 구제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위원회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역학자 우롄더(伍連德), 보건부장 류루이헝(劉瑞恆), 영국 출신 보건 활동가 존 그랜트, 수문학자 올리버 토드, 영국 출신 난민 문제 전문가 존 호프 심슨 등이 그들입니다. 평소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국제연맹도 지원에 나섰습니다.
끝내 곡물, 밀가루, 고기 등 막대한 구호 물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장강 연안에 무역 거점을 둔 국가들은 황폐해진 마을을 재건할 자재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재난이 중국을 덮쳤습니다. 1931년 가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1945년까지 이어지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구호 물자 운송이 어려워졌고 홍수 희생자는 더 늘어났습니다. 이윽고 세계는 이 비참한 참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오늘날까지 이보다 참담한 홍수는 다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문헌
- Courtney C., The Nature of Disaster in China: The 1931 Yangzi River Floo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 Konstam A., Yangtze River Gunboats 1900–49, Osprey Publishing, 2011
- Tolley K., Yangtze Patrol: The U.S. Navy in China, Naval Institute Press,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