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해방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성 혁명이 1960년대에야 시작됐다고 믿으시나요?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도덕적 전환은 그보다 무려 50년이나 앞선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터질 때마다 사생아의 수는 기록을 갱신했고, 매춘부들의 행렬이 군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오래된 풍경이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제한적인 규모에 그쳤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였습니다. 충돌한 강대국들이 수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고, 매일 수천 명의 병사가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거의 확실한 죽음 앞에서 장교든 부사관이든 도덕은 완전히 잊혀졌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을 본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의 원칙은 단순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즐겨라!"
『전쟁의 아름다움과 슬픔(The Beauty and the Sorrow of War)』의 저자 페테르 엥룬드(Peter Englund)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를 찾은 연합군 병사 중 무려 20%가 성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캐나다 병사들은 특히 무모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에서 복무하는 동안 거의 넷 중 하나꼴로 "더러운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통계는 쉽게 해석됩니다. 기회만 닿으면 거의 모든 병사가 매춘부를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상대의 건강 상태나 위생 여부는 대체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많은 군대는 휴가를 나가는 병사에게 콘돔을 배급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는 아예 콘돔 미사용에 처벌까지 내렸습니다.
더 나아가 각국 군부는 적을 죽이는 일 외에 또 하나의 우선 과제를 꼽았는데, 바로 매춘부 통제였습니다. 예컨대 1915년 8월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자 즉시 유료 매춘에 종사하는 모든 여성을 등록하고 검진에 들어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매매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사실상 무제한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매춘부가 군대를 따라다녔고, 군대는 공식 매음굴을 설치하거나 심지어 바퀴 달린 이동식 매음굴까지 운영했습니다. 대도시에서는 매춘이 금지된다는 것을 아무도 애써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카운터에서 여자 한 명을 주문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매춘이 대체로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 매춘 관련 체포 건수는 무려 40%나 증가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바퀴 달린 매음굴. 문자 그대로 말입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병사들을 위한 공식 유락소.
장사가 워낙 잘 되었던 모양입니다. 경륜 있는 여성들은 전쟁 수행에 일종의 '자원봉사' 형태로 참여하기까지 했습니다. 페테르 엥룬드의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이랬습니다.
"가장 값비싼 매춘부들(...)은 소위 '대자(godson)'를 두고 있었다." 그들 각각은 애국심 때문에 병사 한 명을 '입양'했는데, 이는 그 병사가 휴가로 집에 돌아오면 무료로 그녀의 성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군이 갖은 방역 조치를 취했음에도 매독과 각종 성병 감염률이 끔찍하게 높았던 이유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의외로, 많은 병사들이 오히려 감염되기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엥룬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감염된 매춘부가 건강한 매춘부보다 더 많이 벌던 시절도 있었다. 전선에서 빠져나와 제대하기 위해 성병이라도 걸리고 싶어 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표현은 임질 환자의 고름 거래였다. 병사들이 고름을 사서 자신의 생식기에 발랐고, 입원하게 되기를 바랐다.
폴란드의 매음굴을 찾은 독일군 병사들.
극도로 절박했던 이들은 사타구니 대신 고름을 눈에 발랐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평생 실명으로 이어지는 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같은 이유로, 결핵에 걸려 가래를 뱉는 병사들의 가래 역시 거래되곤 했습니다.
출처
페테르 엥룬드, 『전쟁의 아름다움과 슬픔: 세계 대화재 시대, 스무 개의 특별한 운명』,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