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졌고, 대량 처형과 강간,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1914년의 독일군은 1939년의 그들보다 결코 덜 잔혹하고 비인간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군의 선두 부대가 벨기에 국경을 넘었습니다. 독일은 스스로 보장했던 벨기에의 중립을 정면으로 짓밟은 것입니다.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벨기에군은 강대한 침략자의 압력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을 자극하지 마라
8월 20일, 독일군은 브뤼셀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점령 지역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빌헬름 2세 황제의 군대 후방에서 벌어진 소요 사건들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 붙었습니다. 베를린은 이러한 행위의 배후로 소위 프랑티외르(franc-tireurs), 즉 의용저격병으로 불리는 게릴라들을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벨기에 민간인 대부분은 독일군의 망상에 희생된 것입니다. 이언 커쇼(Ian Kershaw)는 저서 『지옥으로부터, 유럽 1914~1949』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독일 병사들에게는 게릴라전에 대한 거의 편집증적인 공포가 주입되었다. 병사들은 저격수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행위나, 아군 오인 사격조차 배후의 배신적인 공격으로 여겨진 사건에 대해 민간인을 탓하곤 했다. 심지어 병사들이 피해자들의 무고함을 명백히 알면서도 집단적 '징벌'이 가해졌다.

독일 병사들은 어디에서나 게릴라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국민들의 생명을 걱정하여 침략자에 대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각 지자체에는 무기를 현지 당국에 인출하라는 고시가 붙었는데, 이는 유혈 사태, 약탈 또는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어떠한 구실도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치의 목록
독일군은 침공 첫날 바르사주(Warsage)에서 최초의 인질 14명을 총살했고, 25채의 가옥에 불을 질렀습니다. 바티스(Battice) 마을 역시 연기 속에 사라졌습니다. 그곳에서는 147채의 건물이 불타고 주민 33명이 살해당했습니다. 한 독일 장교는 '평정된' 이 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축사 안의 가축들은 절규했고, 반쯤 탄 닭들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내달렸으며, 농부 차림의 두 남자가 벽에 기댄 채 시체로 누워 있었다.
에르브(Herve) 마을은 함락된 지 나흘 뒤인 1914년 8월 8일, 제국군 병사들에 의해 불탔습니다. 여성 5명을 포함한 민간인 40명이 총살당했고, 화재는 300채가 넘는 건물로 번졌습니다. 한 독일 기자는 당시 보도에서 이 도시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광장은 시체로 뒤덮였고, 곳곳에서 타는 냄새가 진동했으며, 교회는 잔해 더미만 남았다'고 적었습니다.
멜렌(Melen) 마을에서는 108명이 살해당했는데, 희생자 중에는 80세 노인부터 몇 살 먹지 않은 어린이까지 있었습니다. 한 소녀는 처형되기 전 스무 명의 병사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8월 10일에는 린스모(Linsmeau)에서 주민 1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야만
카이저 군대의 진격로에서 벨기에군의 최대 저항 거점이었던 리에주 요새가 함락된 후에도 민간인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8월 20일부터 21일 사이, 앙덴(Andenne)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해 11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뫼즈 강 건너편 셸(Seilles)에서는 점령군이 50명을 총살하고 그들의 가옥을 약탈했습니다.

앙덴 학살의 희생자들.
앙덴 학살 이후, 벨기에를 통과하던 제2군을 지휘하던 독일의 카를 폰 뷜로(Karl von Bülow) 장군은 인근 마을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고시를 게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앙덴 주민들은 우리 군대에 평화로운 의사를 표명해 놓고, 가장 배신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나의 승인 하에 지휘관은 이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고 110명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폰 뷜로에게 이것은 벨기에인들이 자신의 부대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도록 하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8월 22일에는 타민(Tamines) 마을에서 특히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마을이 함락된 후 이틀간의 강간과 약탈의 난동이 이어졌고, 술에 취한 병사들은 모든 도덕적 억제를 벗어던졌습니다. 이후 주민 약 400명이 마을 중앙 광장으로 몰려갔고, 병사들은 인파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알에 맞아 즉사하지 못한 사람들은 총검으로 찔렸습니다. 이 야만 행위로 384명이 사망했으며, 최연소 희생자는 13세, 최고령은 84세였습니다.
디낭의 학살
또 하나의 중요한 벨기에 요새인 나뮈르(Namur)를 함락한 후, 점령군은 전술을 바꿨습니다. 즉결 처형을 중단하고 더욱 '계획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시마다 각 거리에서 최대 10명의 인질을 확보한다는 내용의 고시를 게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독일군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위반 행위라도 있으면 총살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차례로 함락된 도시들에서 점령군은 지역 유력 인사, 특히 지방 자치 단체 관계자와 성직자들을 예방적으로 구금했습니다. 특히 성직자들은 반독일 선동과 저항 부추김의 혐의를 뒤집어씌워졌습니다.

타민 학살 희생자 추모비.
한편 벨기에의 도로는 피난민들로 붐볐습니다. 국경 마을 비제(Visé)에서는 8월 23일 점령군이 포격당했다는 구실로 주택의 3분의 2가 파괴되고 주민 약 30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또한 700명의 남성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 나머지 약 4,000명은 인근 마을로 피신했습니다. 불타버린 도시는 완전히 텅 비었고, 훗날 비제를 방문한 미국 외교관은 그곳이 파괴된 폼페이를 연상시킨다고 회고했습니다.
비제가 불타던 바로 그 시기, 디낭(Dinant)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훼손된 다리 복구 작업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그 목격자가 바로 제3군 사령관 막스 폰 하우젠(Max von Hausen) 장군 본인이라고 주장되었습니다. 디낭의 수백 명 주민이 마을 중앙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과 분리된 뒤 광장 양쪽에 두 줄로 세워졌고, 첫 번째 줄은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두 개의 분대가 가운데에 서서 일제히 발포했습니다. 독일 병사들은 철저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서 있거나 무릎 꿇은 표적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소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학살로 612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최연소는 생후 석 달도 되지 않은 갓난아기 펠릭스 피베(Felix Fivet)였습니다.

조지 웨슬러 벨로우스(George Wesley Bellows)의 그림 「디낭 학살」.
루뱅의 비극
이 오래된 대학 도시의 파괴는 간접적으로는 겁먹은 말 한 마리가 빚어냈습니다. 그곳에 주둔하던 점령군이 크게 놀라 혼란 속에 난사가 벌어졌고, 패닉 상태의 독일 병사들은 상상 속 게릴라를 사냥하며 서로에게 발포했습니다. 폰 뤼트비츠(von Lüttwitz) 장군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라는 결정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방화와 살인, 약탈은 1914년 8월 30일까지 5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세계 여론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중세의 귀중한 필사본과 인큐나불라(초기 인쇄본)로 가득했던 14세기 대학 도서관이 불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8월 28일, 루뱅에서 파괴의 난동이 한창이던 때 미국 외교관 휴 깁슨(Hugh Gibson)이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목격한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검게 그을린 벽과 그을린 들보를 가진 집들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보도는 뜨거웠고 재로 뒤덮여 있었다. 사람과 말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 많은 시신이 부풀어 있었는데, 이는 며칠 전에 죽었다는 뜻이었다. 각종 잔해, 가구, 병, 찢어진 옷(...)이 잔더미와 재 사이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루뱅에서는 248명이 사망하고 1천 채가 넘는 건물이 불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추방되었고,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시민들이 가축 운송 열차에 실려 뮌스터(Münster)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손을 씻는 독일
대전 발발 첫 달 동안 독일 병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벨기에 민간인 약 6,000명을 살해했습니다. 이는 우발적인 폭력이 아니라, 벨기에 사회를 겁주고 굴복시키기 위해 전형적인 독일식 꼼꼼함으로 준비된 계획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프랑스로 진격하는 독일군에게는 안정된 후방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일 외무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이 모든 희생자에 대한 책임을, 자국민들에게 독일에 대한 저항을 선동했다는 벨기에 정부에 돌렸습니다! 심지어 '여성과 소녀들도 전투에 가담해 부상자들의 눈을 뽑아 실명시켰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허위 정보였습니다.

1914년 가을 독일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밀려오자, 빌헬름 2세 황제(가운데)는 윌슨 대통령에게 위선적인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입장은 카이저 빌헬름 2세 본인마저 고수했습니다. 루뱅 파괴 이후 세계 언론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자, 그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특별 전문을 보냈습니다.
그 안에서 그는 벨기에에 닥친 불행이 '벨기에인들의 범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신의 심장이 피를 흘린다고 위선적으로 적었습니다. 이어지는 메시지에서 그는 벨기에 정부의 행동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그의 표현을 빌리면 '피에 굶주린 민족'에 대해 가장 엄격한 진압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며 뻔뻔하게 벨기에 정부를 비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