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의 전쟁 기술 — 이 전술 덕분에 헤트만은 전장에서 무적이었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Jan Karol Chodkiewicz)는 '스웨덴 정복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거둔 대승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적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과연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카리스마와 전쟁 경험만으로 화려한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 1602년 말 리보니아 최고 사령관(헤트만) 직을 맡았을 때 호드키에비치 앞에는 고된 임무가 놓여 있었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스웨덴군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공의 비결

유능한 지휘관인 헤트만은 개방된 평지에서의 정면 충돌에서 적들이 대개 폴란드군에게 패배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역사가 레셰크 포호로데츠키(Leszek Podhorodecki)는 호드키에비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신속한 행동력과 총력전을 벌이려는 성향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옛 폴란드 전술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작전술에서 그는 중앙에 요새화된 진영을 처음으로 구축했는데, 이곳에 집결한 기병대는 소수의 보병이 방어하는 요새들을 위한 기동 예비대 역할을 했다."

이 뛰어난 지휘관이 스웨덴군에게 포위된 요새를 구원하러 나서며 여러 번 승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1603년에는 라크베레 성(Rakvere) 수비대를 돕기 위해 출진했다. 사흘간의 강행군 끝에 스웨덴 선봉 부대와 조우했고, 후사르(hussar) 기병들은 이들을 완전히 분쇄했다(스웨덴군은 독일 용병 약 70명과 에스토니아 농민 100명이 전사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은 1명 전사, 2명 부상에 그쳤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의 전쟁 기술 — 이 전술 덕분에 헤트만은 전장에서 무적이었다

스웨덴군은 후사르 기병대를 합당하게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데르스 렌나르손(Anders Lennartsson) 장군이 더 큰 병력을 이끌고 나섰다. 호드키에비치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태에서 교전을 감행할 위험은 감수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스웨덴군은 후사르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그저 물러나 버렸다.

더 강한 적을 이기는 방법

1604년 9월 24일, 헤트만은 발트스톤(White Stone, 오늘날 에스토니아 파이데/Paide) 구원에 나섰다. 그가 이끈 병력은 2,300명, 적은 6,000명이었다(2,500 대 5,000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스웨덴군을 지휘한 아르비드 에릭손 스텔람(Arvid Eriksson Stälarm)은 폴란드군이 적을 유인해 흩어놓은 뒤 고립된 보병을 섬멸하는 전술을 파악하고, 이번에는 두 부대를 섞어 배치했다.

그렇다면 호드키에비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상대의 더 강한 좌익에 병력을 집중해 우위를 확보하고 승기를 잡은 뒤, 곧바로 병력을 중앙과 반대편 익으로 돌려 싸웠다. 결과는? 헤트만의 보고를 믿는다면 스웨덴군은 3,000명을 잃었고, 그 자신은 81명 전사와 약 100명 부상만 입었다.

그는 1605년 9월 27일 키르홀름(Kircholm) 전투에서도 비슷한 전술적 방식으로 승부를 펼쳤다. 여기서 병력 격차는 더욱 극심했다(폴란드군은 약 3,440~4,000명, 스웨덴군은 약 11,000명으로 추산). 그리고 헤트만의 활약은 더더욱 전율적인 결과를 낳았다.

적측은 전사자의 절반 이상을 잃었고, 폴란드군의 전사자는 불과 100명(부상 200명)에 그쳤다. 스타니스와프 헤르브스트(Stanisław Herbst)는 키르홀름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술적 승리 중 하나로 꼽았다. 마리안 쿠키엘(Marian Kukiel)은 이렇게 썼다.

"키르홀름은 완전한 결전, 즉 적을 섬멸하는 전투의 전형적인 사례다. 역사상 이처럼 완벽한 승리는 물론, 이토록 큰 격차로 거둔 단 한 번의 승리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속도, 기습, 창의성

"호드키에비치는 빠르다" — 스웨덴군이라면 이 말을 연신 되뇌었을 것이다. 키르홀름 전투 전, 그가 지휘하는 폴란드군은 단 이틀 만에 약 80킬로미터(125킬로미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를 행군했다. 그런데 9월의 리보니아를 가로지르는 것과 혹한의 겨울을 건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1609년 2월, 헤트만은 파르누(Pärnu)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병사들은 6일 동안 숲과 황야를 헤치며 200킬로미터를 주파했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의 전쟁 기술 — 이 전술 덕분에 헤트만은 전장에서 무적이었다

고된 강행 덕분에 호드키에비치는 늘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3월 1일 새벽 일격을 준비하던 때, 간첩의 밀고를 받은 파르누 수비대가 성에서 포격을 퍼부었다. 기습은 실패했고, 정공법의 공성전을 벌일 병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호드키에비치는 계략을 썼다. 후퇴를 명령한 뒤, 병사들이 적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멈추라고 명령한 것이다. 단, 불 피우는 것은 금지했다.

폴란드군은 몇 시간, 자정까지 기다렸다. 바로 그때 헤트만은 군대를 일으켜 다시 파르누로 진군했고, 이번에는 스웨덴 수비대를 완전히 놀라게 했다. 해가 뜨기 전 도시는 공격자의 손에 들어왔다. 그들은 대포 104문과 상선 2척을 노획했고, 이는 호드키에비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안겨주었다…

노획한 배에 더해, 파르누에 머물던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로부터 배 몇 척을 추가로 매입했다. 스웨덴 포로, 리투아니아 보병, 현지 선원들로 신속히 승무원을 꾸린 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리가(Riga)를 봉쇄하던 스웨덴 함대가 정박해 있던 살리스(Salis) 항으로 향했다.

1609년 3월 23~24일 밤,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는 생애 유일한 해전을 치렀다. 먼저 가연성 물질을 가득 실은 소선(火船) 2척을 살리스 항으로 몰아넣었다. 불타는 배에서 스웨덴 함선 2척에 불이 붙었고, 혼돈이 휩쓸었다. 기습을 당한 스웨덴군은 포화 속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키르홀름의 승자는 자신의 전기에 또 하나의 승리를 추가했다.

"천재의 사명은 범상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을 발견하고, 빠르게 붙잡아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 — 율리안 우르신 님체비치(Julian Ursyn Niemcewicz)는 이 승리를 이렇게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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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의 지휘관들의 성공 비결은 책 "폴란드의 전쟁 신들"(Polish Gods of War)에서 읽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