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배신자들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전쟁 중 점령군에 협력하며 같은 민족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돈 때문이었을까, 권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부과한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체코 언론인 밀로시 돌레잘(Miloš Doležal)은 저서 『재단사, 헌병, 낙하산 부대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협력하기로 결심한 배신자들의 태도와 동기를 추적한다. 책의 주인공, 정확히는 '안티히어로'는 재단사 보후슬라프 부슈타(Bohuslav Bušta), 헌병 오스카르 펠클(Oskar Felkl), 그리고 직업군인 카렐 추르다(Karel Čurda) 세 사람이다.
셋 중 폴란드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은 추르다뿐이다. 라인하르트 하이트리히 암살 사건 이후 체코 저항운동에 치명타를 안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히틀러 초상화 앞에서
반면 재단사 부슈타의 협력 동기는 훨씬 소박했다. 전부 돈 문제였다. 부슈타는 시골의 평범한 장인으로 작은 재단점에서 일했지만, 재봉에는 재능도 마음도 없었다. 그는 전쟁이 만든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기로 한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한 뒤 그는 벽에 히틀러 초상화를 걸었고, 독일계 여관주인인 삼촌에게도 다가섰다. 어느 날 친척 집을 방문한 부슈타는 나치 단체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지도자이자 제국 수상인 아돌프 히틀러의 강령을 무조건적으로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군사적 충성을 맹세합니다."
처음에는 딱히 일이 커지지 않았다. 부슈타와 삼촌, 몇몇 동료들의 '나치 활동'이라곤 히틀러 초상화가 걸린 '제단'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지지를 외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부슈타는 이제 막 가속을 붙이고 있었다.
협력의 재능
그는 먼저 SD(제국 보안부)의 협력자이자 정보원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술집, 가옥, 마을 회관 창문 밑에서 귀를 기울였고, 엿들은 이야기를 보고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그의 '재능'은 금세 게슈타포의 눈에 띄었고, 게슈타포는 그를 영입해 '실(Niť)'이라는 코드네임을 붙여주고 보수 체계까지 마련해주었다.
부슈타는 매달 고정급 500~1,500크라운 외에도 성과급을 받았다. 경제 범죄자 적발 정보에는 300크라운, 특히 중요한 발견에는 500크라운, 특별한 성과에는 일시금 2,000~10,000크라운이 지급됐다. '실'은 게슈타포에서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재단사 노동과 달리 이 일에는 확실한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의 작전 중 하나는 진짜 걸작이었다.
게슈타포 요원들은 밀정들과 함께 악마적인 계획을 세운다. 숲속에 벙커를 파고 모든 것을 정교하게 위장한 뒤, 저항운동 조직을 꾸리고 비소치나(Vysočina) 지방 전역에 불법 국민위원회를 세우려는 파르티잔 부대인 척하는 것이다.
'실'과 일당은 위장된 게슈타포 요원들 사이 잠자리에 든 수십 명의 순진한 저항운동가들을 함정에 빠뜨려, 은신처와 암호, 그리고 강제노동을 피해 숨어 지내던 다른 동료들의 신상까지 스스로 털어놓게 만든다. 이들 대부분은 훗날 테레진이나 다른 독일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한다.
부슈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945년 1월, 독일의 패망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도 그는 지하조직 대원들이 모이는 장소를 게슈타포에 알렸다. 독일 추적조는 숲에서 공작원들을 기습했고, 세 명이 도주하던 중 사망했다. 이 '세 목숨'에 대한 게슈타포 상사의 보상은 파격적이었다. 5,000크라운과 담배 150개비. 이 작전 이후 며칠간 해당 지역 전역에서 대량 검속과 잔혹한 심문이 벌어졌다. 다행히 이것이 제국 보안기관들이 체코 땅에 남긴 마지막 발자국이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다
4월 말 게슈타포는 문서 소각을 시작했다. 요원들은 민간인 차림에 가짜 신분증까지 갖추고 미군의 포로가 되기 위해 바이에른 방향으로 몸을 숨겼다. 소련군에게 붙잡히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고, 미군 포로수용소 생활은 길어질지언정 최소한 문명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질 것이므로였다.
그러나 부슈타는 체코를 떠나지 못했다. 전쟁 최후의 날까지 은신하면서도 조국을 등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계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계산이 빗나간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새 정권의 척결대, 즉 체코 국가안보군단(SNB)을 거쳐 NKVD의 소련 심문관들에게 순식간에 넘어가고 말았다.
1945년 6월 부슈타는 재판에 회부된다. 후회의 기색은 조금도 없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듯 그는 증언한다. "우리는 3개 구(okres)의 불법 지하 조직을 폭로해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우리의 활동 덕분에 약 35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관청과 공공기관의 공포였습니다."
1946년 4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밤, 곡괭이와 사다리, 담요를 이용해 흄폴레츠(Humpolec) 구치소에서 세 명의 수감자가 탈옥했다. 그중에는 부슈타도 있었다. 탈옥 전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오스트리아로 도피할 작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46년 12월 9일, 쿠트나호라(Kutná Hora) 특별 인민법원은 부슈타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는 궐석 선고였다. 수백 명의 목숨을 짊어진 체코인 협력자, 배신자, 밀정, SD·게슈타포 요원 부슈타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책에서…
출처
- M. Doležal, 『재단사, 헌병, 낙하산 부대원 — 체코 협력자들의 세 이야기』, 야기에워니안 대학교 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