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장교들이 죄수들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주문하고, 수용생들은 자발적으로 '예술의 아침'을 열고, 신발이 지닌 중대한 의미까지. 수용소의 현실을 기록한 이야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종종 그곳의 '일상성'을 드러내는 단면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당신이 아직 몰랐던 것들은 무엇일까요?
이번 순위의 모든 항목은 우리가 발행한 기사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수용생들의 삶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직원들을 다룬 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몰랐던 이야기들…
10. 아우슈비츠에는 독일 최고 명문 병원보다 뛰어난 성과를 낸 산파가 있었다
해방 후 아우슈비츠에서 발견된 영아 한 명(출처: 퍼블릭 도메인).
유대인들을 도운 혐의로 수용소에 끌려간 스타니스와바 레시친스카(Stanisława Leszczyńska)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산파로서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종종 참담한 환경 속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막사를 따라 달린 굴뚝 곁에서 분만을 진행했고, 멸균된 시트 대신 이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담요만이 그녀의 도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정한 생명의 천사가 거둔 성과는 멩겔레 박사마저 경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맡은 모든 분만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출산 과정에서 산모나 신생아가 사망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9. 수용생들은 여가 시간에 '예술의 아침'을 열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아우구스트 코발치크(August Kowalczyk)는 아우슈비츠에 '오락 프로그램'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초현실적이고도 마카브레한 풍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우슈비츠의 수용생들 역시 매일의 혹독한 노동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잠시나마 숨통을 트이기 위해 자발적인 오락 활동을 벌였습니다. 담요로 만든 '무대' 위에서 예술가 출신 수용생들은 수용소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고, 독백을 선보이며 시를 낭송했습니다. 실제 무대 공연은 물론 서커스 공연까지 열리기도 했습니다.
비밀 극장에는 흉내 배우, 곡예사, 광대, 심지어 마술사까지 등장했습니다. 한 수용생은 동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폴란드 고지방 민속춤을 패러디하며 남자와 여자 역할을 모두 맡아 추기도 했습니다. "머리에는 그릇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손에는 국자를 든 채 (…) 그는 춤을 추고, 걷고, 뛰고, 소리 지르고, 노래했다"라고 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8. SS는 회화를 높이 평가했기에 재능 있는 수용생은 살아남기가 더 쉬웠다
디나 고틀리보바(Dina Gottliebova)는 어린이 막사 벽에 디즈니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장면을 그려낸 뒤 멩겔레 박사에게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사진: Camila Meneses Castro, CC BY-SA 4.0).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수용생들은 다양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어떤 때는 잔혹한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된 다른 피해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강요당했고, 또 어떤 때는 SS 장교들이… 자신의 아내나 애인의 초상화를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멩겔레 박사 역시 재능 있는 화가들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습니다.
7. 열차 하역 작업은 정신적으로 가장 괴로운 일이었지만, 굶주림과 탈진에서 구원해 주었다
강제 이송은 일부 수용생에게 생존의 기회를, 또 다른 이들에게는 취미를 이어갈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진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새로 도착한 수용생들의 선별 장면입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때로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열차 객차에서 영아들의 시신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열차 주변에서는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하역 작업은 수용생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실려 온 음식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시병들은 음식 외의 물건이 빼돌려지지 않는 한 이러한 행위를 묵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6. 독일은 수용소 바로 인근에 이상적인 나치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교통망 개요가 포함된 '대(大)아우슈비츠' 도시 계획도.
오시비엥침(Oświęcim) 부지에는 모범적인 아리안 중심 도시가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새로운 아우슈비츠의 수석 건축가 한스 슈토스베르크(Hans Stosberg)는 순식간에 거대 건축에 대한 집착에 빠져들었습니다. 1943년 1월의 설계안에 따르면 그가 세우려던 도시에는 무려 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하던 독일인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죽음 공장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를 부끄럽게 여길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5. 최소 한 명의 수용생은 파트너의 질투 때문에 수용소에 끌려갔다
97명의 동성애자들이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으나 해방까지 생존한 이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사진은 핑크 삼각형 표식 아래 희생자들을 기리는 베를린의 추모판입니다. 핑크 삼각형은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를 표시하던 표식이었습니다(사진: Michael F. Mehnert, CC BY-SA 3.0).
동성애자들은 독일 형법 제175조에 근거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형사 수용생 또는 성범죄자의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대다수의 체포 경위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수용생이 질투에 사로잡힌 파트너의 밀고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4. 수용소의 다섯 가지 '기본 재앙' 중 하나는 잘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의 수천 켤레의 신발(사진: Bibi595, CC BY-SA 3.0).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발은 수용생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신발은 굶주림, 추위, 과중한 노동, 질병이라는 수용소의 다른 '기본 재앙'들만큼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발이 만들어낸 마찰 상처는 곧 상처와 감염으로 이어졌고, 치유가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3. SS 장교들이 폴란드인들 앞에서 선술집에서 취하지 않도록 특별한 휴양 시설이 지어졌다
솔라휘테(Solahütte) 시설이 남긴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는 카를-프리드리히 회커(Karl-Friedrich Höcker)의 앨범에서 나온 것입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솔라휘테가 설립되기 전, 수용소에서의 업무에 지루함을 느낀 SS 장교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미엥츠브로지에 비알스키에(Międzybrodzie Bialskie)를 자주 찾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심의 식당에서 하루짜리 잔치, 친목 행사, 무도회를 즐겼습니다. 나치 지도부는 SS 장교들이 '열등 인종' 앞에서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해 특별한 휴양 마을을 짓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2. 수용소 역사상 최대의 봉기는 동료들로부터 협력자로 여겨졌던 수용생들이 일으켰다
특별작업대(Sonderkommando) 소속 수용생들은 수용소에서 학살된 수용생들의 시신을 태우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특별작업대에 배정된 수용생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죽음의 집행을 유예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들은 나치를 위해 어두운 일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새로 도착한 이들을 가스실로 안내하고, 이후 시신을 운반하고 태우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의 다른 수용생들은 그들을 자기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협력자들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특별작업대 전원을 '교체'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특별작업대 수용생들은 무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소 역사상 최대의 봉기였습니다.
1. 독일은 아우슈비츠의 운영 덕분에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일은 수용소 화장터에 특별히 금세공 작업장을 설치해 치아에 박힌 금을 채취했습니다(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주된 목적은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용생들에게서 강탈한 재산, 그들의 무상 노동, 심지어 '적절히 활용된' 시신까지 나치에게 어마어마한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량학살 위에 세워진 하나의 기업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회고. 『굿나잇, 아우슈비츠 — 생존자들에 관한 리포트』에서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