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동안 '노란 조끼' 시위대의 세금 인상 반대 시위가 프랑스 언론을 장식했다. 물가는 갈수록 오르는데 임금은 제자리걸음이다. 사람들은 쉽게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떠올리지만, 사실 1934년에도 프랑스 국민은 거리로 나섰고, 그 결과 우파 세력의 쿠데타 기도로 번진 적이 있다.
1934년은 벌써부터 불안하게 시작되었다. 화보 감상 주간지 데텍티브(Détective)는 1월 호 표지에 불안한 표정의 금발 여성을 실었다. 캡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34년은 증오와 비극, 재앙으로 가득한 미래를 향해 불안하고 초조한 눈을 뜬다." 파리에서는 때때로 파업이 일어났고, 넓은 대로마다 임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으며,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그러다 1934년 2월 6일, 사태가 본격적으로 터졌다. 격분한 군중이 콩코르드 다리를 건너 부르봉 궁전(Palais Bourbon)을 습격하려 한 것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회의사당인 이곳에는 새로 출범한 달라디에 내각의 정부 연설을 청취하기 위해 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군중은 해당 내각의 퇴진과 "부패한 정치 깡패들"을 단호히 응징할 강력한 단일 지도자의 등장을 요구했다. 제3공화국은 끝장을 봐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경제 침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34년 프랑스는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성인 남성의 10%가 참호에서 전사하면서 인구 위기까지 겹쳤다.
전후 재건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독일의 배상금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배상금 지급은 계속 차질을 빚었고, 여기에 1929년 세계 대공황마저 덮쳤다. 인구가 적었던 탓에 실업률은 처음에는 낮게 유지되었지만, 1933년에는 프랑스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연이은 내각들 – 1933년 한 해에만 다섯 번 교체되었다 – 은 모두 프랑스화(franc) 평가절하를 하지 않고 예산 균형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많은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지출을 줄이고 귀한 돈을 주머니에 묵혀두어야 했다. 그 결과물은 완전한 경제 정체였다.
독일의 역동성에 대한 질투
게다가 제3공화국은 정치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온건 우파인 급진사회당(Radical Socialist Party)은 1924년 이후 급속히 교체되는 내각들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때로는 중도좌파와, 때로는 중도우파와 연정을 구성했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색채를 지닌 내각이든 프랑스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상대방과 싸우는 데 소모했다. 게다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고, 부패와 족벌주의가 만연했다.
1934년,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기성 정치 질서에 더 이상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특히 정치 스펙트럼의 극우 진영에서 불신이 컸다. 그들은 최종적인 경제 붕괴와 그에 따른 공산주의 세력의 장악을 두려워했다. 프랑스 보수세력은 이웃 독일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934년 히틀러는 확고히 권력을 장악했고, 그의 지도 아래 나라는 탄탄한 궤도에 올라 있었다. 독일의 역동성은 프랑스의 정체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우파 진영에서는 제3공화국을 전복하고 독일의 사례를 따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부유한 실업가들은 보수적이고 반민주적인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와 주느스 파트리오트(Jeunesses Patriotes), 솔리다리테 프랑세즈(Solidarité Française), 무브망 프랑시스트(Mouvement Franciste) 같은 소규모 극우 단체들을 지원하며 정부에 맹렬히 반발했다. 분노에 찬 참전용사들의 단체인 국민참전용사연합(Union Nationale des Combattants)과 크루아 드 푀(Croix de Feu)도 여기에 가담했다.
가짜 뉴스
언론은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최근 미국 대선 당시 양극화된 신문, 뉴스 사이트, TV 채널이 미친 교란 영향과 비교할 만한 상황이었다. 데텍티브 같은 프랑스 화보 주간지에서는 스캔들과 파산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모든 정치 세력은 자기들만의 잡지를 운영했고, 신문 칼럼에서는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에 늘 존재해 온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는 책, 영화, 기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많은 프랑스인들이 결정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고립주의로 빠져든 미국인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반미 감정 또한 유행했다.
대중에게 정보를 알리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모든 문제를 외국인과 유대인 탓으로 돌리고 자극적인 범죄 이야기와 선정적인 험담에 빠져드는 것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판매 부수에 눈이 멀었던 많은 매체는 진실에 대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정치 단체에 소속된 신문들은 저마다의 의제를 밀고 나갔다. 정치와 선정주의가 뒤엉켰고, 사실과 허구가 뒤섞였다. 할 말 하자면 '가짜 뉴스'의 원조였다.
스타비스키 사건
1933년 말, 프랑스 언론은 사샤 스타비스키(Sacha Stavisky)를 둘러싼 사건에 열광했다.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였던 그는 오랜 사기꾼 경력 동안 프랑스 상류 사회의 핵심부까지 올라갔다. 교묘한 인맥과 뇌물 덕분에 스타비스키는 수년간 법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었다. 그의 가장 수익성 높은 수법은 바욘(Bayonne)에서 그가 공동 설립한 시립 대출 은행을 통해 2억 프랑 상당의 가짜 채권을 발행한 것이었다.
경제 위기가 프랑스까지 닿으면서 스타비스키의 고객들이 바욘에서 채권을 현금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카드의 집이 무너졌고, 몇 주 안에 스타비스키의 사기 조직이 적발되었다. 부패한 관료들이 하나둘 체포되었고, 알베르 달리미에 장관마저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결국 중도좌파의 술탕탕 내각 전체가 이 사건으로 무너졌다.
스타비스키는 샤모니로 도피했고, 1934년 1월 8일 경찰이 그의 은신처를 찾아오자 자살했다. 그러나 신문들은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이름을 폭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에서 명령을 받은 경찰이 스타비스키를 살해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우파 언론은 정부의 사임을 촉구했다. 스타비스키의 죽음은 정치적 화약고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1934년 2월 6일
2월 6일, 악시옹 프랑세즈부터 크루아 드 푀까지 모든 극우 단체가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 일부는 결국 부르봉 궁전을 습격했다. 15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당했지만, 경찰은 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도좌파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어쩌면 대중의 분노를 스스로 부른 면이 있다. 그는 개혁을 추진한다며 인기 높은 파리 경찰청장 장 키아프를 해임했고, 스타비스키 사건에 연루된 용의자 관료들을 승진시켜 정치인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달라디에 내각은 사임서를 제출했고, 중도우파의 가스통 두메르그(Gaston Doumergue)가 뒤를 이었다. 이로써 스타비스키 사건의 뾰족한 부분은 빠져나갔다. 반민주 진영은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두메르그 내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극우 단체들은 조직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2월 6일 이후에는 더 이상 하나로 행동하지 못했다. 분열로 인해 그들은 추진력을 잃었다.
'레옹 블룸보다는 히틀러'
정치 스펙트럼의 좌파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 기도에 충격을 받아 '프롱 포퓰레르(Front Populaire, 인민전선)'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전선을 결성했다.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제3공화국을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하겠다고 약속했고, 경제 위기 대책과 사회 개혁을 내걸었다. 인민전선은 1936년 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레옹 블룸(Léon Blum)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했다.
보수 진영은 경악했다. 가톨릭 프랑스의 운명이 이제 유대인 사회주의자의 손에 쥐였다는 것이다! "레옹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는 속삭임이 곧 퍼졌다. 블룸이 모든 극우 단체를 해산시키자, 크루아 드 푀는 진짜 정당인 프랑스사회당(Parti Social Français)으로 변신했다. 성과는 컸다. 1934년 2월 3만 5천 명이던 당원 수는 1937년 블룸 내각이 붕괴할 무렵 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절실히 필요한 개혁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고, 인민전선은 곧 사라졌다. 프랑스는 보수 세력의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렵게 버텼다. 1940년, 히틀러가 마침내 프랑스를 침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