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알바 공작과 '피의 재판소': 네덜란드를 뒤흔든 스페인의 공포 통치

반란 진압을 명받은 알바 공작

네덜란드에서 성상 파괴 소동(아이코노클라즘)이 일어난 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알바에게 병력 1만 명과 더불어 사태를 스스로 판단해 처리할 수 있는 무제한적 권한까지 위임했습니다.

알바 공작은 두 번 권할 것도 없이 즉각 행동에 나섰습니다. 1567년, 그는 스페인에서 북쪽으로 진격해 그곳의 반란을 끝장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원래부터 혹독하고 무자비한 처사로 유명했던 그였기에, '피의 재판소'를 비롯한 일련의 강경 조치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한층 더 굳건히 다져주었습니다.

공포의 법정, '피의 재판소'

네덜란드에 도착하자마자 알바는 '항의 재판소(Raad van Beroerten)'를 설립했습니다. 반란 세력은 이곳을 '피의 재판소(Bloedraad)'라고 불렀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특별 법정으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소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판결 역시 결코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피의 재판소는 약 1,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널리 퍼진 일화에 따르면, 평의원 중 한 명은 늘 잠들어 지내다가 판결을 내려야 할 때만 깨어났고, 그의 판결은 언제나 한마디로 요약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교수형에 처하라!"였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

오라녜 공 빌럼(빌럼 판 오라녜)의 동료였던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은 피의 재판소의 최초 희생자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이러한 공포 통치 덕분에 알바는 나쁜 평판을 얻었고,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꼬는 것을 즐겼습니다.

4월 1일의 우스갯소래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우절(4월 1일)과 얽힌 동요입니다. 1572년 4월 1일, 오라녜 공 빌럼을 따르던 수상 해적, 이른바 '물거지(Watergeuzen)'가 스페인군으로부터 브리엘(Den Briel) 시를 탈환했습니다. 네덜란드어로 '브리엘(Briel)'이 '안경(bril)'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4월 1일에 알바는 안경을 잃었다"는 말장난이 담긴 노래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알바 공작의 이름은 공포와 함께 풍자의 대상으로도 네덜란드 역사에 오랫동안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