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100년 전의 '해답'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0%가 직장에서 때때로 바람을 피운다고 답했다. 놀라운 통계처럼 들리지만, 100여 년 전에는 직장 내 성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여성을 노동 현장에서 몰아내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거대한 창관'이라 불린 도자기 공장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의 레호우트 도자기 공장은 '거대한 창관 하나'로 묘사될 정도였다.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감독관들과 성관계를 맺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신문 레흐트 포어 알렌(Right for All)이 1890년 이 사실을 보도했다. 피임 수단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원치 않는 임신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898년 열린 전국 여성노동 박람회에서는 일하러 나간 젊은 여성들이 "가장 추악한 행위에 빠져 있으며… 어떤 소녀는 결혼하지 않은 채 세 번이나 출산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치욕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
당시 결혼 밖의 성관계는 용납될 수 없는 불명예였다. 문제는 그 대가가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돌아갔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책임 없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반도프(Van Dorp) 의원은 1910년, 이 같은 '도덕의 황무지'를 막는 방안으로 젊은 여성의 공장 노동 금지를 내세웠다. 덧붙여 여성들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 진정한 사명, 즉 살림살이와 가족 돌봄을 준비할 시간을 갖게 될 것이란 것이 그의 논리였다. 물론 금지 조치가 여성들에게 안길 경제적 타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법보다 앞선 '자구책': 시가 공장주의 선택
일부 사업가들은 법이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1800년대 후반, 한 시가 제조업자는 연구자에게 자신의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좁은 작업장에서 남녀 시가 제작자들이 지나치게 가까워진 끝에 혼외자식까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유혹은 순식간에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공장 외에 다른 종류의 공장까지 차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다른 종류의 공장'은 곧 '아기 공장'으로 읽힌다. 여성의 노동과 삶을 통제하기 위해 '도덕'과 '가족 보호'가 명분으로 내세워졌던 시절, 공장은 여성에게 소득을 얻는 일터인 동시에 낙인찍힐 위험한 공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