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 순간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이끄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권력은 '보이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그 극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 국민들은 당과 정부에 맞서 대규모 행동을 벌여야 했다. 사람들은 도시 곳곳에서 점점 더 거대한 시위를 열고 시민운동 조직을 결성하며 저항했다.
지도부가 내놓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한 '공허한' 이념적 약속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국민들이 요구한 개혁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동독(GDR)에 대한 해외의 비판 여론, 열악한 사회·경제 여건 등의 영향 아래 커져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지도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체포, 탄압, 추방으로 되돌아왔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은 수많은 시민들이 국경을 넘어 떠났고, 당원들이 잇달아 사임하면서 당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당 지도부가 권력을 회복하려면 개혁 외에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크렌츠는 자신이 내걸었던 '전환(Die Wende)'을 실현할 만큼 충분히 개혁 지향적인 인물이었는가? 그리고 기존의 권력 구조는 과연 그러한 개혁을 허용했는가?
동독 체제의 마지막 몇 달
당의 통치가 끝나가는 마지막 시기, 당 서기장 에곤 크렌츠를 개혁가로 볼 수 있을까? 즉, 국민들의 개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당의 권력과 당 자체를 구할 수 있었던 개혁가였을까?
동베를린의 각국 대사관들은 SED 정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8월 말, 네덜란드 대사관은 이미 호네커(Honecker) 서기장의 후계 문제를 검토하며 가장 유력한 후보로 크렌츠를 꼽았다. 그러나 크렌츠가 호네커의 대안으로 신뢰할 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네덜란드 일간 NRC는 1989년 10월 9일자 보도에서 새 지도자의 세계관이 "그의 스승인 호네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동독의 상황은 "아직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기반 위에 세워진 하나의 국가일 뿐인 나라에서, 개혁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체 정당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며칠 뒤 네덜란드 대사 야콥스(Jacobs)는 크렌츠에 대한 평가 변화를 포착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에 대해 야콥스는 그날 보안군이 무력 개입하지 않은 '공'은 크렌츠에게 돌아간다고 기록했다. 그는 SED 내에서 안보 업무를 총괄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날의 평화적인 경과에 대한 책임도 그에게 있었다. 크렌츠의 평판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이끌었던 청년동맹의 입지 역할을 하던 신문 <융게 벨트(Junge Welt)>에 실린 눈길을 끄는 '비판적' 기사들과도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야콥스는 "크렌츠가 마지막 순간에 호네커(그리고 자신의 평판)와 결별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야콥스에 따르면, 크렌츠가 발표한 당 노선의 '전환'에 대한 동독 내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며 어깨를 으쓱하는" 수준이었다. 크렌츠가 경제 문제에 대해 길게 언급한 것은 그가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반면 그가 새로운 야권 운동을 대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점은 실망스러웠다.
취임 후 몇 주 동안 크렌츠는 새로운 정치 스타일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 서둘렀다. 근로자 참여 문제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여행의 자유를 제공하려 했지만, 동독 시민들의 대거 이탈은 여전히 그에게 가장 큰 난제로 남아 있었다.
개혁가로서의 신뢰성
그러나 그의 개혁가로서의 신뢰성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첫째, 많은 동독 국민들은 당 서기장 취임 며칠 만에 국가평의회 및 국방평의회 의장마저 선출된 사실에 실망했다. 결국 전임자 호네커 때처럼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그가 당의 중심 권력 위치를 고수하겠다는 의사를 즉각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크렌츠는 호네커의 '제2인자'였던 과거, 그리고 1989년 5월 선거 조작의 책임이 있던 선거위원회 위장이었던 전력 때문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심지어 같은 해 10월 초에는 6월 베이징 학생 시위 진압을 옹호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네덜란드 대사관과 언론은 '전환' 노선의 모호성 때문에 국민들이 크렌츠의 약속을 '너무 적고, 너무 늦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대사관은 1989년 10월 24일 크렌츠의 연설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여행의 자유와 선거 절차에 관한 그의 발표는 항의 운동 진영의 눈에 충분하지 않았다. "항의 운동의 요구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것을 넘어섰다. 완전한 여행의 자유, 자유롭고 비밀이 보장되는 선거, 결사와 집회의 자유, 검열 폐지, 당과 국가의 분리. 이제 국민은 당의 권력 독점 폐지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도부는 왜 이처럼 미흡한 방안을 내놓았을까? NRC는 지도부의 비전과 시민들의 바람 사이의 괴리에서 답을 찾는 듯했고, 그 원인은 동독에서 개혁이 본질적으로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는 데 있었다. 트라우(Trouw) 신문은 이로 인해 크렌츠가 "농민과 노동자들이 (떠나가는)" 와중에도 "노동자·농민의 국가"를 붙잡고 있는 처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풍자했다.
게다가 크렌츠는 변화가 오직 사회주의를 보존하는 가운데, 심지어 사회주의 개선을 위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이념적 관점을 끝내 고수했다. 크렌츠는 그리고 남은 시간 내내 강경한 공산주의자였다. 2007년 <벨트(Wel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언급하며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을 재확인했다. "지금 존재하는 정치 체제는 내 체제가 아니다(Das politische System, das jetzt existiert, ist nicht mein System)."
동독의 정치 체제는 개혁을 허용했는가?
후일 연구에 따르면, 설령 크렌츠가 실제로 개혁을 단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의 지배적 지위를 희생하는 대가로 치러져야 했다. 그는 처음부터 사회주의 동독과 SED의 주도적 역할을 구원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첫째, 크렌츠가 야권 운동과 추진한 대화 정책은 그 자체로 동독 내 SED 주도 역할의 종언을 의미했다. 둘째, 헌법에 명시된 SED의 지도적 역할이 '의회'에 의해 철폐되었다. 셋째, SED는 당과 국가 기구가 결합된 구조 속에 스스로 얽혀 있었다. 당은 국가 기구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정당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복수정당제를 갖춘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과 함께 제기되는 정당성의 문제, 그리고 이와 함께 SED 존립 권리의 '정당성'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지도부는 두 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광범위한 개혁으로 국민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동독이 자본주의화될 것을 우려했다. 그것은 독일연방공화국과 별개로 존재하는 동독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훼손하는 일이었다. 반면에 개혁을 하지 않으면 시민들의 집단 이탈은 계속될 것이고, 이는 SED와 동독 국가의 지배적 지위를 똑같이 위협할 것이었다. 얽혀 있던 국가·당·이데올로기의 실타래를 풀면 도미노 효과로 기둥이 하나씩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두 독일의 통일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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