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잘못된' 예술가들은 욕을 받았는가, 용서받았는가? — 전후 네덜란드 미술계의 숙청과 재평가

점령기의 선택, 쿨투어카머 등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독일 점령당국이 설립한 '쿨투어카머(Kultuurkamer)'에 반드시 등록해야 했습니다. 등록하지 않으면 공공장소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없었고, 유대인은 아예 등록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점령군과 협력한 이들의 행보를 전후 네덜란드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비겁한 굴복이었을까요, 아니면 불가피한 생존의 선택이었을까요?

쿨투어카머는 1942년 설립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화가, 무대 의상 디자이너, 작가, 음악가 등 창작 분야 종사자 전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정확히 몇 퍼센트의 예술가가 이 기관에 가입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수가 등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는 남아 있지 않는데, 쿨투어카머의 기록 보관소는 전쟁 말기 독일군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후원과 예술가들의 현실적 선택

독일 점령당국은 네덜란드 회화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보조금, 콘테스트, 유료 위탁 작업 등을 통해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는 문화 부문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전쟁 전 네덜란드 정부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독일 쪽이 급여도 더 후했기에,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 등록했습니다.

다만 등록에는 일종의 검열이 따랐습니다. 독일은 전통적인 회화 스타일을 요구했습니다. 네덜란드의 풍경, 일상의 장면, '아리안인다워 보이는' 인물들을 담은 작품으로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이념을 네덜란드인들에게 각인시키려 한 것입니다.

연구자가 밝힌 진실

역사학자 클라르티에 베셀링크(Claartje Wesselink)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런 순응적인 예술가들을 향한 네덜란드 사회의 태도를 연구했으며, 일부 화가들의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통념상 전후 예술가들은 쿨투어카머 등록 때문에 질타를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베셀링크는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화가들은 점령군의 요구에 맞춰 회화 스타일을 바꿨습니까?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다이즘 같은 20세기 초의 실험적·현대적 흐름은 이미 1930년대 이전에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경제 위기의 시절, 예술가들은 전통 스타일로 회귀하고 있었죠. 이는 독일의 바람은 물론 일반 대중의 취향과도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추상 작품보다 이런 스타일을 선호했고, 수요도 상당했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는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폭락하면서 더욱 그랬습니다. 예술품은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투자했습니다. 덕분에 미술 시장은 이 시기에 크게 호황을 누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스타일이 다시 변해 화가들이 추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기억과 결부된 전통 스타일을 잊고 싶다는 마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혁신과 미래를 원했습니다."

나치 치하의 예술, 그리고 보이지 않던 상징

화가 파이커 코흐(Pyke Koch)는 무솔리니에게 영향을 받아 전쟁 직전과 전쟁 중에 파시즘적 특징을 지닌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반 대중은 물론 미술 평론가들의 경각심도 낮았습니다. 약 1937년경 앙리 반 데르 펠더(Henri van de Velde)가 그린 '새로운 인간'이라는 그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불타는 책과 인골 옆에 선 건장한 금발의 남성이 담겨 있습니다.

1930년대에 이 남성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새로운 그리스도형 인물로 해석되었습니다. 20세기 초의 여러 혁명과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이후, 이런 적대 대상은 나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들을 돌아볼 때에야 우리는 국가사회주의적 상징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전쟁 직전과 전쟁 중의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해방 직후의 숙청, 실제로 어떤 처벌이 내려졌나

해방 직후 '잘못된' 예술가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전쟁 직후 이른바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적과 협력했거나 협력이 의심되는 네덜란드인들은 특별법원에 회부되어야 했고, 예술가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집단에는 추가로 시각예술가 숙정심의회(Purification Council)의 직업 윤리 절차라는 별도의 통로가 있었습니다. 이 심의회는 예술가들이 직업 활동을 통해 적과 협력한 정도를 조사했고, 그 결과 일정 기간 전시 금지 같은 직업적 제재가 내려졌습니다. 쿨투어카머에 등록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받은 예술가는 아무도 없습니다. 선전물 제작 등 추가적인 행위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쿨투어카머 등록을 어떻게 회고했습니까? "많은 예술가들이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느꼈습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의 증언을 들여다보면 죄책감을 느낀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코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죠. 그리고 다른 선택지도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모두가 등록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지하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초상화 같은 위탁 작업은 할 수 있었지만 공개 전시는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저항 조직 운영과 도피자 지원 등에 쓰이는 자금을 지급하던 저항 단체의 '국가지원기금'이 있었고, 지하 예술가들도 여기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파이커 코흐, '잘못된 예술가'의 전형이었는가

파이커 코흐는 '잘못된' 예술가의 좋은 사례입니다. 그는 점령당국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그렸지만, 그것은 이념적·정치적 동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후에도 그는 매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전통적 스타일을 이어갔습니다. 숙청 기간 동안 코흐는 특별법원과 시각예술가 숙정심의회, 두 기구 앞에 서야 했습니다. 특별법원에 회부된 NSB(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운동) 당적 관련 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고, 직업 숙청 심의회는 1950년부터 1년간 전시를 금지하라고 판결했지만 코흐는 계속 전시를 강행했습니다.

직업 숙청 심의회의 판결은 출발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법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1946년에야 이루어졌고, 모두가 판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코흐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인맥을 지닌 엘리트적 인물이었고 귀족 출신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전쟁 후에도 부유한 후원자가 꾸준히 그의 작품을 구매했지만, 무엇보다 코흐가 실력 있는 화가였기에 빌럼 산베르흐(Willem Sandberg) 같은 미술계 거물들도 그의 작품에 계속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에게 코흐의 전쟁 중 행적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코흐는 전쟁 중 얼마나 잘못했을까요? 전쟁 첫해에 그는 선전물을 제작하고 '새 질서의 구원'을 다룬 글을 발표했습니다. 1941년에 이 입장을 철회했지만, 쿨투어카머에는 등록했고 점령군에 작품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술 자체를 위해 살았지 정치적 이념에서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셀링크의 연구는 '잘못된' 전쟁 이력과 전후 예술 경력의 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재기의 열쇠는 결국 실력

'잘못된' 예술가들은 가능한 처벌을 받고 나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로 예술가의 재능에 달려 있었습니다. 미술계의 핵심 인물들은 전쟁 이력 여부와 관계없이 뛰어난 화가와 함께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빌럼 산베르흐를 예로 들면, 그는 전쟁 후 저항 운동 참여자 신분으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관장이 되어 미술계 현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산베르흐는 마음에 드는 화가라면 전쟁 중의 과거를 외면했습니다. 독일에 작품을 판매한 바 있는 카렐 아펠(Karel Appel)이 대표적입니다. 아펠의 전쟁 이력을 고발하는 편지가 산베르흐에게도 도착했지만, 그는 편지를 서랍 속에 '보관'만 했을 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화가들에게는 전쟁 과거가 함께하지 않을 명분으로 쓰이곤 했습니다. 정치적 서사를 예술의 논리에 맞게 비틀어 해석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은 산베르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비판의 목소리는 언제부터 나왔나

그렇다면 '전후에 이 예술가들이 배척당했다'는 현재의 통념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쿨투어카머 회원 자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1960년대에야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의 평론가들은 '잘못된' 예술가들의 전시에 대해 전쟁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60년대의 항세대가 젊은 평론가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멀어질수록 예술가들의 전쟁 이력은 더욱 냉혹하게 드러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전쟁 이력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악은 매혹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