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이야기

모래폭풍은 없었다… 5만 페르시아 군대를 전멸시킨 것은 이집트 반군이었다

기원전 6세기, 이집트 사막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 대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믿기 어려운 전설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군대는 모래폭풍이 아니라 이집트 반군의 공격으로 패배했으며, 이 막대한 손실은 이집트인들의 저항을 더욱 부추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은폐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난 1월, 라이덴 대학교의 고고학자이자 이집트학자 올라프 카페르(Olaf Kaper)는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이집트 다클라 오아시스 신전 발굴 과정에서 그는 우연히 여러 개의 상형문자 블록을 발견했습니다. 이 블록에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점령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현지 반군 왕 페투바스티스 3세(Petubastis III)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발견은 역사에서 빠져 있던 결정적인 퍼즐 조각이 된 것입니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모래폭풍?

발견 이후 카페르는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몰두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카페르는 말합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사막으로 진입한 뒤 갑작스러운 모래폭풍에 휩쓸려 전멸했다고 합니다. 모래폭풍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군대 전체가 학살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군대가 왜 사막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도 헤로도토스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아주 수상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빠진 퍼즐 조각은 바로 반군 왕입니다. 헤로도토스조차 알지 못했던 이 원정의 진짜 목표가 바로 그였습니다. 페투바스티스 3세는 이집트 제국의 한적한 구석지대인 다클라 오아시스에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카페르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Cambyses II)는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오아시스로 진격했습니다. 테베(현 룩소르)라는 남부 출발점에서 이집트 서부 사막 한가운데 있는 다클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간다면 이 설명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집니다.

7일간의 행군 끝에 카르가 오아시스에 도착하는데, 이는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원정 경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문제는 군대가 더 서쪽으로 나아갈 때 벌어집니다. 카페르는 말합니다. "거대한 페르시아 군대는 제 생각에 반군과 교전했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반군은 승리 후 북쪽의 수도 멤피스로 진격하며 도중에 마주치는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습니다. 멤피스의 저항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페르시아 측은 이 패배를 은폐했습니다."

그러나 은폐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페투바스티스 3세는 군대와 함께 수도에 도착해 도시를 점령하고 파라오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승리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권위 강화를 위해 아메이다(Ahmeida)에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카페르가 발견한 블록은 바로 이 신전의 일부로,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증명하는 증거라고 그는 말합니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블록에는 페투바스티스 3세의 왕호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이름은 '두 나라(상·하 이집트)를 강하게 하는 호루스'입니다.

반군의 처참한 최후

이 반란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일 계곡을 제외한 이집트의 광대한 영토를 페르시아는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년 후, 유명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5년)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이 과정은 매우 잔혹한 것이었고, 패배한 많은 반군 지도자들이 페르시아로 압송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페투바스티스 3세 역시 포로로 잡혔지만,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카페르는 말합니다. "비스툰 비석(Bisitun relief)은 다리우스 통치 초기에 일어난 이 반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반군 지도자들이 묘사되어 있지만, 페투바스티스 3세의 이름은 목록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목록에 없다고 해서 그가 포함되지 않았거나 다른 반군 지도자들처럼 페르시아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추가 연구가 이를 밝혀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리우스 치하의 페르시아는 이집트 영토를 공포로 통치했으며, 주민들이 입을 열기를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약 75년 후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모래폭풍 속에서 사라진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기록했습니다.

더 많은 발견들

카페르가 밝혀낸 것은 페르시아 군대 실종의 원인만이 아닙니다. 그는 다리우스 왕이 남부 오아시스 지역에서 신전 건설을 갑자기 활발히 벌인 이유도 찾아냈다고 믿습니다. 카페르는 말합니다. "이후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리우스는 남부 이집트를 재편했습니다. 그는 외딴 오아시스들을 이집트 본토와 통합하기 위해 그곳에 신전을 건립했고, 새롭고 효율적인 관개 시스템을 도입해 이 지역의 농업을 급속히 발전시켰으며, 국가 개입을 강화하기 위해 더 많은 관리들을 배치했습니다. 인프라도 확장되어 오아시스와 나일 델타 사이의 교통량이 늘어났습니다. 이는 모두 반군이 조용히 군대를 규합할 수 있는 변방의 구석지대가 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카페르는 내년에 다클라 오아시스로 돌아가 발굴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는 페투바스티스 3세와 그의 반군의 거점이었던 다클라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