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노예제 폐지가 상당히 늦은 나라였다. 특히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연구자 마르티 얀세(Maartje Janse)는 이것이 국민들의 저항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NTR 다큐멘터리 시리즈 '노예제(De Slavernij)' 제작에 참여했으며, 케니슬링크(Kennislink)를 통해 이 주제에 대한 배경 정보를 추가로 제공했다.
기록 조사로 드러난 반노예제 운동의 흔적
1863년 네덜란드는 수리남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잉글랜드(1833)와 프랑스(1848)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점이다.
그동안 이러한 늦은 폐지는 네덜란드에 반노예제 운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되어 왔다. 잉글랜드나 미국과 달리 19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 보관소 연구 결과, 19세기 네덜란드에서 노예제 존속에 대한 항의는 기존에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자유주의자와 반혁명파, 남성과 여성, 청소년, 심지어 어린이까지도 노예제의 참상에 마음을 움직였다. 일부는 돈을 모아 노예를 몸값으로 사서 해방시키는 실질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이들은 반노예제 협회를 설립하고 서명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항의했다.
본보기였던 잉글랜드
사실 18세기 말부터 이미 노예제에 대한 논의가 존재했다. 베터 울프(Betje Wolff) 같은 계몽주의 인사들이 노예제에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조직적인 반노예제 운동이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혁명 이후 네덜란드 시민들은 오랫동안 정치에서 멀어져 있었고, 1840년경에야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생겨난 초기 반노예제 운동은 정부 정책에 맞선 최초의 시민 항의 운동 중 하나였다.
이는 첫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소극적이고 낯설기까지 한 행보로도 설명된다. 영국의 사례는 서로 다른 정치·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폭넓게 협력하여 수십만 명의 서명이 담긴 대규모 청원으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반면 1841년 네덜란드에서 자유주의자와 반혁명파의 광범위한 연합을 만들려던 시도는 참패로 끝났다. 두 집단은 오히려 일시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였다. 각자 자신들의 반노예제 청원에 더 많은 서명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가장 많은 서명을 모은 것은 제3의 세력, 즉 '로테르담 여성 반노예제 위원회(Rotterdam Ladies Anti-Slavery Committee)'의 여성들이었다(128명). 이들의 청원은 여성만이 서명한 최초의 청원이었다.
1840~1850년대에는 여러 반노예제 협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자유주의 발기인 중 한 명인 얀 아케르스데이크(Jan Ackersdijck)의 방대한 개인 기록물 속에는 네덜란드 최초의 반노예제 협회 중 하나의 전체 기록이 보존되어 있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긴 이름을 가진 협회이기도 하다. 바로 '네덜란드 및 외국 식민지, 특히 노예 해방에 관한 지식에 공헌하는 잡지 발행 협회'(1843~1848)다.
출판 협회의 창립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부가 노예제 폐지 문제에 대한 시민 개입에 반대 입장을 밝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약 150명이 이름을 올린 가운데 함께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고, 이 문제를 대중의 주목을 받게 만들었다. 당시 식민지 정책은 국왕의 전유물이었기에, 그들은 식민지 정책의 투명성을 요구했다.
1848년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하고 하원이 식민지 문제에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자, 그들은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 없이 노예제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도 이 안을 기각했다. 시민과 그 재산을 국가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언클 톰의 오두막'과 여성들의 움직임
1853년 하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의 '언클 톰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폭넓게 논의되었고, 노예들의 고통에 감동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노예제 존속에 항의하고자 했다.
'노예제 폐지 촉진 네덜란드 협회'가 가장 중요한 반노예제 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여성은 이 협회에 가입할 수 없었다. 여성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 사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여성들은 별도의 활동을 통해 노예제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특히 여성들은 노예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1855년에는 암스테르담의 여성 733명이 국왕에게 반노예제 청원서를 제출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하급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요르담 지역의 가정부와 술집 종업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유한 중산층 여성들도 노예제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1855년부터 '수리남의 복음 선포와 노예제 폐지 촉진을 위한 암스테르담 여성 위원회'의 여성들은 노예를 몸값으로 사서 해방시키기 위한 기금을 모았다. 그들은 해방된 노예들의 선량한 행실이 네덜란드인들이 노예제 폐지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버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기금 모금은 미국과 영국에서도 흔했던 방식, 즉 반노예제 수공예 바자회나 추첨회를 열어 진행했다. 그들은 매주 수공예 모임에 자리를 함께해 자수 슬리퍼, 방석, 심지어 안락의자 같은 고급 물품을 만들어 추첨하거나 팔았다. 그동안 한 사람이 노예제 폐지 진행 상황에 관한 기사를 읽어 주었다. 왕실 가족 구성원과 심지어 노예들까지 수백 명이 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거나 복권을 구매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반노예제 컵과 접시 세트도 바로 이 추첨회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들이 노예 아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돈을 모금했다는 증거도 있다. 청소년들은 노예제 반대 '청년 협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위트레흐트에는 특별한 반노예제 학생 협회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과 청소년들이 더 급진적인 수단과 언어로 항의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보기로 삼은 영국과 미국의 반노예제 운동과 훨씬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실제로 청년들은 '언클 톰의 오두막'의 작가를 네덜란드로 초대하려 했고(결국 실패했지만), 영국 반노예제 운동가들을 초청해 강연 투어를 열기도 했다.
시민과 정치의 조화
반면 자유주의와 반혁명파 진영의 반노예제 인사들은 훨씬 신중했다. 그들은 노예제 반대 운동이 '네덜란드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국이나 미국보다 시민과 정치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정치 문화에서, 그렇지 않으면 항의가 역효과를 낼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 탓에 네덜란드의 반노예제 운동은 '대중 운동'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항의 운동은 대중정치 이전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동원된 수백, 때로는 수천 명의 규모가 돌이켜보면 작아 보일 수 있으나, 당시 기준으로는 큰 숫자였고 반노예제 운동은 시민의 정치 참여라는 면에서 개척자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운동에서 여성과 청소년이 차지한 놀라운 역할은 기존 역사학에서 간과되어 왔다. 따라서 노예제 폐지가 상대적으로 늦었던 것은 항의 운동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원인은 국고가 비어 있는 상태에서 정부가 노예 소유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며 폐지를 추진해야 했다는 데 있었다. 1850년대 말에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재배 시스템(Cultuurstelsel)'에서 흘러들어온 막대한 자금이 다시 국고에 쌓이기 시작했다. 사실상 자바인들이 고생한 덕분에 노예 소유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 글은 NTR 다큐멘터리 시리즈 '노예제(De Slavernij)' 5부(2011)의 네덜란드 노예제 폐지 관련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전체 시리즈는 방송 다시보기 서비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