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는 논쟁거리다. 영국인들이 비소로 체계적으로 독살하여 프랑스 황제를 조기에 사망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을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게도 1815년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웰링턴 공작이라는 영국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폐위된 황제는 성헬레나 섬에서의 유배 생활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나폴레옹은 얼마나 위험했는가
나폴레옹이 어떻게 자신을 워털루에서 물리친 정복자에게 목숨 빚을 지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영국 원수의 확고한 반대가 없었다면, 프로이센군은 1815년 '작은 상사'를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총살대 앞에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명의 고위 프로이센 군인 간의 서신 교환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 웰링턴 참모부에서 연락 장교로 복무하던 카를 F. 폰 뮈플링 소장과 아우구스트 N. 폰 그나이제나우 장군이 바로 그 인물들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미 1815년에 이 세상과 작별할 뻔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프로이센의 처형 요구
1815년 6월 27일자 서신 한 통에서 폰 그나이제나우 백작은 자신의 상관인 블뤼허 원수의 입장을 전달했다. 앤드루 로버츠의 저서 『나폴레옹과 웰링턴: 긴 결투』에 인용된 내용이다:
"보나파르트는 연합국에 의해 법적 보호 밖의 인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 귀하는 협상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인도되어 장차 처형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정의와 3월 13일 선언이 요구하는 바이며, 우리 병사들의 피 또한 이렇게 [...] 갚아질 것입니다."
프로이센 장군이 언급한 선언문은 엘바섬 탈출 소식이 빈에 모인 열강 대표단에게 전해진 직후인 1815년 3월 13일, 빈 회의 기간에 서명되었다. 중요한 점은 웰링턴 역시 이 선언문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 열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시민적·법적 관계의 규범 밖에 있으며, 적이자 세계 평화의 적으로서 공공의 심판(la vindicte publique)에 넘겨졌음을 선언한다."
그나이제나우, 뮈플링, 블뤼허. 세 사람 모두 나폴레옹을 총살대 앞에 세우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웰링턴의 거절과 그 이유
결국 프로이센 측은 분노한 장군들과 외교관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에서 합의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그 유명한 정복자가 코르시카 출신 황제 살해에 손길을 보탤 생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폰 뮈플링(그리고 그만이 아니었다)은 선언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언은 결코 나폴레옹의 살해를 촉구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 행위는 역사에 우리 이름을 범죄자로 기록하게 만들 것이며, 후세는 우리가 나폴레옹의 정복자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행위는 완전히 무의미하고 아무런 목적도 없습니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듯이, 이러한 답변은 폰 블뤼허 원수와 폰 그나이제나우 백작을 크게 기쁘게 하지 못했다. 앤드루 로버츠는 저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후자, 즉 반영주의자였던 그는 훗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웰링턴의 '연극적인 자비'를 불평했고, 나아가 공작의 인도적인 행동은 자신의 경력이 영국의 '위대함, 번영, 부'를 그토록 오래 이어주었던 인물을 살려두려는 욕망의 위장일 뿐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처형에 대한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측은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고, 최소한 프랑스 황제를 자신들에게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측 역시 이에 동의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자체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나폴레옹을 바위투성이의 성헬레나 섬으로 이끌게 되었다.
출처 및 참고 자료
- 앤드루 로버츠(Andrew Roberts), 『나폴레옹과 웰링턴: 긴 결투』(Napoleon and Wellington: The Long Duel), Replica,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