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답은 명확해 보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책임자는 독일이라는 것. 그러나 그로부터 90여 년 동안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이 사실인지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프랑스도 똑같이 유죄였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오히려 영국이었을까요? 네덜란드에서는 거의 잊혀졌지만 무려 1,000만 명의 군인 목숨을 앗아간 전쟁, 그 발원지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들을 소개합니다.
올해는 '모든 전쟁의 어머니'라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한 달 만에 지역 분쟁이 유럽 대전으로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를 방문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중부 유럽의 거대한 다민족 제국이었습니다.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탄에 쓰러집니다. 이후 사건들은 눈 깜짝할 새 연쇄적으로 전개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인접국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러시아는 '슬라브 형제'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군대를 동원합니다. 독일은 전쟁 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겠다고 밝히며 러시아에게 동원 중단을 요구하지만,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곧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자 독일은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합니다. 영국은 독일에게 벨기에 중립 침범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만, 독일의 전쟁 계획에는 벨기에를 경유하는 진격이 포함되어 있었고 결국 영국마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때가 1914년 8월 4일입니다.
잠깐, 잠시만요. 지역 분쟁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한 달 만에 유럽 전역의 전쟁으로 번져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음모가 도는 외교 게임
"연합국 정부는 선언하며, 독일은 이를 인정한다. 독일의 침략으로 인해 강요당한 전쟁으로 연합국 정부와 그 국민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해 독일이 책임을 진다는 것을."
베르사유 강화조약 제231조는 최소 1,000만 명의 병사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더없이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이 전쟁의 발발은 오로지 독일 탓이라는 것. 따라서 협상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패배했고, 대표단에게 조약 문안이 던져진 뒤 펜이 쥐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카이저 빌헬름 2세 실각 이후 1918~1920년 격렬한 혁명을 겪던 독일이 아니라, 독일의 일방적 전쟁 책임론을 완화하려 애쓴 것은 주로 영국 역사학자들이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국제 외교 체제'야말로 전쟁 발발의 원흉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 잡습니다. 전쟁 직전 수년간 그늘진 외교 게임 속에서 복잡한 동맹 체계가 구축되었고, 그 결과 유럽 열강들은 자국 의회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상호 군사 지원 의무를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20년대에 독일, 오스트리아, 막 성립된 소련, 영국은 방대한 양의 외교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1926년 『국제 무정부 상태 1900-1914』를 저술한 영국 고전학자 로위스 디킨슨을 필두로 유럽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은 외교의 실패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기록 보관 자료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전쟁 전 유럽 외교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구 분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학자들은 오직 이 방법으로만 전쟁의 심층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세계 패권을 향한 손아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논쟁은 조금 다른 국면에 접어듭니다. 베르사유 조약과 여기에 명시된 독일의 일방적 전쟁 책임론이 과연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까요?
혹시 1914년 독일의 전쟁 목표가 1939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역사학 용어로 말하자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945년 이후 독일 역사학자들조차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 문제는 여전히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함부르크의 역사학자 프리츠 피셔는 1961년 『세계 패권을 향한 손아귀(Griff nach der Weltmacht)』를 출간하며 독일 학계 거의 전체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피셔에 따르면 1939년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도 독일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즉 유럽의 상당 부분을 병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1914년 독일 황제가 고의로 전쟁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1939년의 히틀러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피셔는 후속 저서 『환상의 전쟁(Krieg der Illusionen)』(1969)에서 생각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독일이 외부 위협에 대한 대응('외교 우선론')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정치적 압박('내정 우선론'), 이익 집단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피셔의 결론은 명확했습니다. 독일이야말로 이 전쟁의 주범이라는 것입니다.
불가피했던 전쟁?
1984년 영국의 제임스 졸이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저술했습니다. 졸은 1914년 7월 위기(그 요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에도)에서 작용한 모든 변수를 분석에 반영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입니다. 졸은 해당 주간의 행위자들(정부 수뇌부, 장군들, 외교관들)에서 출발하여, 외교, 군비 경쟁, 그리고 마침내 '1914년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차례로 검토합니다.
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914년 정치가들의 선택의 폭은 상당히 좁았으며, 국내외의 모든 상황이 대규모 전쟁을 거의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 전쟁은 '환경의 산물'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특정한 주범을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학구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졸의 접근이지만, 모든 동료 학자들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침략?
1998년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학자 닐 퍼거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책임 논쟁에 뛰어듭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역사학계의 '팝스타'로 불리는 퍼거슨은 역사를 거의 감각적으로, 매혹적으로 이야기하는 재능을 지닌 인물입니다. 1998년 그는 『전쟁의 비탄(The Pity of War)』을 출간했고, 네덜란드어 번역본은 2010년에야 『참혹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퍼거슨에 따르면 이 전쟁은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눈에 주범은 독일이 아니라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전쟁 전 수년간 영국과 독일은 동맹까지 거의 이루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프랑스나 러시아와 달리 독일이 대영제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독일은 경제와 군사 면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크게 뒤처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퍼거슨은 독일인들이 오만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행동했다고 봅니다.
'영국이 벨기에의 중립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했다'는 신화 역시 퍼거슨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중립 벨기에는 오히려 영국 외교 정책의 발목을 잡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만약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지 않았다면 영국이 그렇게 했으리라고 적었습니다.
공정한 비난인가?
전쟁 발발로부터 10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2004년 제1차 세계대전의 권위자 마크 휴잇슨은 광범위한 새로운 연구 끝에 독일 지도부가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육군 최고사령부와 카이저 빌헬름 2세는 고의로 전쟁을 추구한 것입니다. 휴잇슨을 통해 책임의 문제는 90년 만에 원래의 자리, 즉 독일로 되돌아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를 형성한 전쟁입니다. 베르사유에서의 독일 굴욕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직접 이어졌다는 점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1918년 독일에 가해진 비난이 정당했는지 여부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